정해지지 않은 퇴직 희망일
아직 백수가 되지 못했다. 사직서에 적어놓은 퇴직 희망일대로라면, 지금쯤 아버지 있는 곳을 오가며 일처리를 하고 있을 텐데. 오늘도 매일 보던 네 사람과 마주치면서 공원을 가로질러 출근하고 있다. 뭐랄까... 덤으로 일한다는 느낌 때문인지 발길이 무겁다. 두 번의 양보 아닌 양보로, 설날 연휴 전에서 2월 말, 다시 4월 말로 사직 가능일이 바뀌었다. 아직 까마득한 날들이 남아있는 셈이다.
첫 번째는 후임자 선발하기에 기간이 촉박하다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선발하고 싶은 사람의 자격 유효기간이 아직 두 달이 남았다는 이유를 내세웠다. 솔직히 말하면 모두 무시하고 사직을 밀어붙여도 된다. 내세운 이유는 전부 회사 측 사정이기 때문이다. 그냥 그렇다는 말이다. 그래도 어디 그런가? 일 년 넘게 몸담은 회사인데, 남아있는 사람들이 힘들어지는 게 불편할 것 같았다.
전기기사 자격 취득 후, 이 년의 실무경력을 갖추어야 전기안전관리자로 선임될 수 있다. 내가 힘겹게 경력을 갖추고 도전한 첫 직장이 이곳이다. 그야말로 여러모로 어리숙한 신참을 기꺼이 받아주었다. 물론 여기 사정도 만만치 않았다. 전임 전기안전관리자가 마음에 들지 않아 권고사직을 시키고, 공석인 상태였다. 규정 상 한 달 안에 선임해야 했는데, 거의 한 달이 되어가는 시점에 지원한 내가 반가웠을 것이다.
근무를 시작하고 삼 개월은 번뇌의 연속이었다. 실력도 경험도 없고, 이곳 사정도 잘 모르는 사람이 연착륙하기에 요구되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거기에다 텃세를 견뎌내야 하는 문제도 있었다. 어쨌든 이 과정을 무난하게 넘기고 일 년 넘게 근무해 왔다. 이건 나의 무던함이 한몫한 것도 있지만, 윗사람이 이해하고 기다려준 공이 컸다는 생각이다. 이런 연유로, 어려움을 호소하는 윗사람을 매정하게 무시하는 것도 도의는 아닌 것 같았다.
전기안전관리자는 전기설비가 있는 건축물에서 전기설비의 운용과 공사 시 안전을 책임지는 사람으로, 법으로 직무를 명하고 있는 법정 직무 자다. 그만큼 책임이 무겁다. 이 말은 들어오고 나가기가 수월하지 않다는 것이다. 나는 운때가 맞아 수월하게 들어왔는데, 나가는 것이 어려운 경우다. 나를 중심으로 두면, 고민할 것도 없다. 이곳 사정이야 어떻게 되든 내 갈길을 가면 되니까. 하나 그렇게 하기에는 심정적인 면에서 한계선을 넘어서기가 너무 힘들다.
정년퇴직을 하고 들어선 이 길에서 많은 보람을 느꼈으면 좋겠다. 그리고 나와 같은 길을 걷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이런 마음이 글을 쓰기 시작한 동기이기도 하다. 물론 일을 하며 겪는 경험을 들려주는 것이 우선이겠지만, 중요한 계기마다 겪는 심리적 상태와 변화 과정도 유용할 것 같다. 그런 면에서 이번 사직 과정도 중요한 이정표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얼마 전, 윗사람이 또 요구했다. 오월 중순까지만 있어주면 안 되겠냐고. 근무를 잘해서 오래 같이 있고 싶어서인가? 아님 단지 자신이 불편해지는 걸 우려한 막무가내식 요구인가? 그간 좋은 기억들을 그대로 간직하고 가고 싶은데, 자꾸 위기감이 몰려온다. 내겐 너무 어려운 사직이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