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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버티기 Mar 08. 2023

나는 파출소로 연행된 적이 있다

1. 아버지와 나

나는 친구와 같이 원주역 파출소에 잡혀간 적이 있었다.

고등학교 2학년 재학 시절이었고, 낙엽이 떨어지기 시작하던 때쯤으로 기억된다.

책방에 욕심나는 참고서가 있었지만 돈이 없어서 친구와 같이 잠바 안쪽에 넣고 나오다가 주인에게 들켰다.

책방 주인에게 잡혀 있다가 출동한 경찰들에 의해 꼼짝없이 파출소로 연행되었다.

파출소에서 전화를 받은 아버지가 화가 잔뜩 난 얼굴로 와서, ‘죄송합니다, 교육 잘 시키겠습니다.’를 연발하며 굽신거려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 집에 와 친구와 같이 무릎 굻고 세 시간 꾸지람을 들은 후에야 상황이 끝났다.


친구야 어려운 형편에 시골에서 원주까지 유학을 와서 참고서 구입이 어려웠지만, 나는 아버지가 교직에 있었기 때문에 그럴 정도의 형편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훔칠 생각까지 들게 한 것은, 아버지의 공부하는 방식에 대한 강요 때문이었다.

예를 든다면 “사과궤짝에서 호롱불을 켜고 공부를 해도 의지만 있으면 된다,” 그리고 “교과서만 가지고 수업시간에 잘 들으면 충분히 잘할 수 있다.”였다.

이러니 참고서를 사달라는 말도 잘하지 못했고, 어렵게 말을 해도 사주지 않았다.

실제로 아버지는 나에게 친척 형이 사과궤짝을 놓고 어려운 환경에서 공부하는 모습을 보여주려고 직접 데려가기도 했었다.

공부하는 방식에 대한 강요도 있었지만, 생활태도와 언행도 숨 막힐 정도로 통제를 받으면서 자랐다.

      

나는 진로와 관련된 것도 전혀 융통성을 발휘할 수 없었다.

아버지는 육사를 가지 못한 한을 나를 통해서 풀려는 생각이 너무도 강했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너는 사관학교를 가야 된다.”는 말을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으면서 자랐었다.

정작 나는 미술, 음악 등 예능 계통에 관심이 많았고, 실제로 전국소년조선일보에서 주최한 전국 어린이 미술대회에 2년 연속 특선으로 뽑혀 장충체육관까지 가서 메달을 수상하기도 했었다.

그래서 머리에 그리던 나의 진로는 미술대학 진학이었다.

결국 고 3 때 억눌린 감정이 폭발하여 반항이 시작되었고, 가장 중요한 시기에 공부를 거의 하지 않게 되었다.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아버지의 의지는 변하지 않았고, 결국 나는 해사로 입교하였다.


2. 나와 아들    

큰 아들이 서른이니까 내가 아버지로 산지도 30년이 흘렀다.

아버지처럼은 하지 말아야지 했었는데, 나도 별반 다르지 않았던 듯하다.

큰 아들이 고 3일 때 나에게 반항하는 모습을 보았으니까.

조금 차이가 있다면 나는 최소한 공부하는 방식이라든가 진로에 대한 간섭보다는 생활 태도와 언행에 관한 지적을 많이 했다.

내 딴에는 공부보다도 ‘먼저 인간이 되어야 한다.’가 지론이었다.

하여튼 내가 숨 막혀하던 것처럼 큰 아들도 진절머리를 냈었다.

나는 큰 아들의 반항하는 모습을 본 이후로 거의 아들의 교육에 손을 놓았다.

아니 방치라고 해야 맞을 듯싶다.

지금 생각하면 아버지와 나의 문화적 차이는 미미했지만, 나와 아들들은 너무 차이가 커서 갭을 컨트롤하는 것에 대해서 자신이 없었던 것 같다.

그리고 아버지와 나의 관계가 똑 같이 반복되는 것이 정말 싫기도 했다.


3. 지금의 아버지와 나 그리고 나와 아들       

아버지는 지금도 만나면 환갑이 지난 나에게 습관처럼 예절 교육을 한다.

어른에게 술을 따를 땐 술병을 어떻게 잡고 술을 먹을 땐 고개를 돌려야 된다는 것, 안부 전화하면서 “식사는 하셨습니까?” 하면 “진지 드셨습니까?” 해야 한다고 어김없이 지적한다.

이제는 만성이 돼서 가볍게 들으면서도 가능한 한 말하는 대로 따르려고 한다.

그런데 아들들은 내가 어쩌다 바른 소리 한 번 할라치면 먼저 얼굴에 한가득 짜증이 묻어난다.

나는 군에서 교수직으로 근무할 때 강의를 해봐서, 강의의 순조로움이 청자의 반응에 좌우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인생 경험을 통해 나오는 지혜’로 받아들이는 것은 꿈도 꾸지 않지만, 최소한 진지하게라도 들어줬으면 하는데도 그게 잘 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대화가 길게 이어질 여지가 없고 아주 형식적인 주고받음 수준에서 머물다 끝이 난다.


4. 어떻게 할 것인가?     

이제 환갑을 지났으니 아들들과 적어도 이십 년은 부자 관계로 지내야 하는 것을 생각하면, 바뀌어야 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지만 솔직히 아들들을 바뀌게 하는 것은 자신도 없거니와 더 멀어지는 위험부담이 있기 때문에 시도하지 않으련다.

아내의 힘을 빌어서라도 일단은 자주 만나는 기회를 만드는 게 우선이고, 만나면 되도록 입은 닫고 귀만 열기로 했다.

그리고 나이가 들어도 열심히 사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을 교육으로 대신하려고 한다.

눈에 거슬리는 것을 보고 말을 안 하면 비겁할 수도 있지만, 당분간은 인내력을 최대한으로 동원해 보기로 했다.  

베이비 부머를 낀세대라고 한다.

낀세대는 부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지만, 양쪽에 선한 영향력을 주는 세대가 되기 위해서 달려 보기로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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