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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버티기 Mar 10. 2023

아버지가  담임선생님이었다

나는 아버지가 담임선생님인 적이 있었다. 

강원도 황지에서도 버스로 한참을 들어갔던 곳의 초등학교였는데, 분교가 아니었음에도 학생 수가 워낙 적다 보니 두 개 학년을 한 반으로 묶어서 편성했었다.

3학년이었던 나는 4학년들과 같은 반에 편성되었고 담임선생님은 아버지였다.

담임선생님이 아버지라고 해서 특별한 것은 없었고 그냥 무서운 선생님이었다.

일 년만 학교를 다녔지만 지금도 기억의 편린들이 떠오르는 걸 보면 좋은 곳임에는 틀림없었던 것 같다.

그곳은 공부에 대한 기억보다는, 친구들과 어울려 산으로 들로 쏘다니면서 자연을 만끽했던 기억이 많이 남아있다.

먹을거리가 정말 부족했던 시절, 냇가에서 잡은 개구리, 물고기 그리고 산딸기, 머루와 다래로 거의 하루에 한 끼를 해결했던 것 같다.

특히, 살집에 많이 올라있던 개구리는 진국의 보양식이었고 지금도 감기가 잘 안 걸리는 게 개구리 덕이 아닌가 생각될 때가 있다.     


나는 아버지가 전근하는 횟수만큼 학교를 옮겨 다녔다. 

초등학교는 4군데, 중학교는 2군데를 다녔고, 시험을 봐서 들어갔던 고등학교만 온전히 다니다 졸업할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학창 시절의 기억들이 너무 흩어져 버렸고, 그나마 4학년부터 졸업할 때까지 다녔던 태백의 초등학교가 가장 많이 남아있는 편이다.

그 학교에서는 글 읽기, 웅변, 그림 등에서 두각을 나타내기도 했었고, 6학년 때는 전교 어린이회장이 되어 어린이회를 이끌기도 했다.

그래서 지금 그 학교 동창들의 모임만 유일하게 네이버 밴드에 살아있다.

하지만 동창들의 기억을 따라잡지 못하면서 한동안 만나던 것도 뜸해지고, 지금은 밴드에서 소식만 염탐하고 있는 신세가 되었다.

동창들이야 6년 내내 같은 기억을 가지고 있지만, 뒤섞여 버린 나의 기억으로는 공감을 하기가 늘 벅차게 생각되었다.     


나는 학창 시절 조각난 기억만 갖게 된 것이 못내 아쉬워서, 나의 자식들에게는 온전한 학창 시절을 맛보게 하고 싶었다.

그런데, 나의 아쉬운 전철을 그대로 밟게 만들어 버렸다.

언젠가 큰아들이 “난 고등학 3년을 매년 다른 학교를 다녔다.”는 말을 듣고 마음이 무척 아팠다.

장교 생활도 직업 중에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만큼 많은 곳을 옮겨 다니는 직업이다.

한 곳에 마음잡고 적응할 만하면 다른 곳으로 떠나곤 했으니까, 완전히 적응하고 익숙해진다는 것 자체가 욕심이었다.

작은아들이 기대보다 학업에 열중하지 못했고, 지금도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정확하게 결정하지 못하는 이유가 전학을 많이 다닌 것 때문인가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나는 학창 시절 전학을 많이 한 것을 가지고 아버지를 원망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정말 어려운 시절, 전근을 자주 하더라도 가족이 같이 모여 살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행복이었으니까.

그리고 여러 학교를 옮겨 다니면서 친구들과 빨리 사귀고 분위기에 조기 적응하는 장점도 있었고, 훗날 많이 옮겨 다니는 장교 생활에서도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된다. 

다행히 내가 보기에 아들들도 잦은 전학에도 불구하고 적응을 못해서 방황을 하거나 심적인 고통을 겪는 모습은 목격하지 못했다.

하지만 내가 보지 못했지만, 아들들의 마음 한편에 늘 허전함이 자리 잡고 있을까 봐 두렵기도 하다.  

대를 이어 안정된 학창 시절을 보내지 못한 것은 안타깝지만 절절하게 희망해 본다.

아들들도 훗날 이런 경험들이 자신들의 꿈을 이루어나갈 때, 긍정적으로 작용되었다고 생각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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