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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버티기 Mar 13. 2023

최악이 최선이 되다

지금부터 33년 전, 나는 대위 계급장을 달고 인천에 있는 해군부대에서 고속정 정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정장 근무 기간이 거의 끝나갈 무렵 나에게 있어 초미의 관심사는 ‘다음 보직은 어디로 가느냐?’였다.

마침, 해군본부에서 근무하고 있었던 전임 편대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일상적인 안부 전화 끝부분에 “너 어디로 가고 싶냐?”하고 물었다.

나는 힘이라도 보태주려나 하는 생각으로 “저 진해 작전사령부 쪽으로 가고 싶습니다.”하고 조금은 기대 섞인 대답을 했다.

그러고는 거의 잊고 지내다 불쑥 인사명령을 받았는데, 다음 근무지가 서해 북방한계선 근처에 있는 소청도라는 섬의 레이다 기지 지휘관으로 되어 있었다.

‘전임 편대장 말을 너무 믿었나?’, 갑자기 후회가 밀려왔다.

소청도는 해군 기지가 있는 섬 중에서 우도에 비견될 만큼 오지로 인식되는 섬이었다.

우도는 무인도라는 확실한 이유가 있었지만, 소청도는 유인도임에도 기피 대상이었다. 

그 이유는 앞서 근무했던 많은 지휘관들이 사고로 인해 처벌을 받고 섬을 떠났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물이 부족하고, 주민들과 관계도 원만하지 않은 등 근무환경이 열악해서 누가 보아도 많은 어려움이 예상되는 섬이었다.     


소청도로 가는 인사명령이 나오기 두 달 전, 창원까지 가서 소개팅을 했었다.

그 당시 편대장을 하고 있던 선배는 부부가 진해 출신이었는데, 모처럼 부인이 인천까지 와서 동기생 정장 3명과 식사를 같이할 기회가 있었다.

식사 도중에 편대장이 농담 삼아 부인에게 “우리 정장들 셋 다 총각인데 힘 한번 써봐라.”라고 했다.

편대장 부인은 그걸 흘려듣지 않고 기억했다가 진해가자마자 백방으로 수소문해서 기회를 만들었다.

때마침 편대가 수리기간이라 정장 세 명은 휴가를 내고 창원으로 내려갔었다.

기대가 크면 실망이 크다는 말이 이때만큼 정확하게 들어맞은 일이 있었나?  

세 명 중 한 명을 제외하고 나머지 두 명은 창원까지 내려간 것을 후회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훗날 알게 된 것이지만 편대장 부인이 만들었던 처자들은 사정이 있어서 못 나오고, 그 처자들이 미안한 마음에 다른 쪽에 줄을 대서 나온 대타 처자들이었다.

우리는 실망해서 파트너도 정하지 않은 채 우르르 몰려다니다가, 인천으로 출발하기 한 시간 전 나의 긴급제안으로 파트너만 정하고 헤어졌다.

그 세 명 중 괜찮았던 한 명이 나의 파트너가 되었고, 훗날 나의 아내가 되었다.


소개팅 후 인천에 올라오고 딱 일주일 만에 그 처자들이 인천으로 왔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처자들 중 한 명이 파트너가 된 정장에게 한눈에 빠져 다른 처자들을 채근해서 올라왔다고 했다.

어쨌든 월급 받기 전 빈궁기에 있었던 우리는 적당히 시간을 보낸 후 내려보냈고, 그리고 잊고 지냈다.

나의 기억이 되살려진 것은 소청도로 가는 인사명령이 나오고 난 이후였다.

차분히 생각해 보니 특별히 단점도 보이지 않았는데, 나머지 두 명의 안 좋은 분위기 때문에 그냥 잊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서른을 목전에 두고 있는 조급함, 며칠 후면 사지로 들어가야 하는 아쉬움 등이 어우러져 전화라도 한 번 해보자는 용기를 냈었다.

어렵게 결심을 했지만 정작 전화번호를 몰랐다.

일이 되려니 그런가, 불현듯 부모님들이 진해에서 목욕탕을 한다는 말이 기억났다.

진해 모든 목욕탕에 전화를 돌려 겨우 미래 장인어른과 통화할 수 있었다.     

전임 편대장이 어디로 가고 싶냐고 물었을 때, 진해로 가고 싶다고 대답한 것이 마치 미래에 일어날 일을 예측했던 것처럼 된 것이다.

소청도 근무 동안 편지가 수레바퀴였다면, 그 처자의 소청도 한 번 방문은 린치핀이었다.

그 처자의 소청도 방문은 내가 지휘한 부대원들에게도, 친근하게 지냈던 소청도 주민들에게도 대단한 뉴스거리였다.

그들은 이런 뉴스를 만들기 위해서 내가 어떤 교언영색과 감언이설로 그 처자에게 정성을 들여왔는지 몰랐다.

그때 당시 소청도는 일주일에 배가 두 번 있어서 한번 들어오면 할 수 없이 이틀은 묵어야만 나갈 수 있어서, 평소 친하게 지내던 주민에게 부탁하여 숙소를 마련하였다.

그런데 미래 장모님으로부터 단단히 교육을 받고 들어온 그 처자는 잘 시간만 되면 쌀쌀한 바닷가에 나가 들어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나에게는 정말 중요한(?) 이틀 밤이었는데, 이틀 모두 부대원들에게 놀림을 당하면서도 부대에 가서 잘 수밖에 없었다.

결국, 나는 삼일째 되는 날 그 처자를 인천행 배에 태우고는 허탈한 마음으로 손을 흔들고 있었다.     


‘뜻이 있으면 반드시 이루어진다.’고 했던가, 1년 7개월 후 소청도를 나가면서 진해의 큰 함정으로 가게 된 것이다.

소청도 사랑은 여기서부터 엄청난 속도로 진도를 나가게 되고 2 개월도 안 되어서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

나는 초급장교로서 의욕이 충만했던 시기에 소청도로 가게 되면서 정말 많은 실망을 했었다.

하지만 짧은 시간에 결심하고 어려운 과정을 거쳤지만, 과감하게 실행에 옮겨 결국 이루어내었던 그때의 선택은 인생에 최고로 잘한 일이라고 자부하고 싶다.

소청도로 들어가게 된 것은 최악이었지만, 소청도에 있는 기간 동안 가장 중요한 인생준비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최선이었다.

그야말로 최악이 최선이 되었다.     


“기회를 포착하는 능력 이전에
필수적인 것은
 ‘다시는 결코 기회가 오지
않는다.’라는 절실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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