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군(軍) 생활의 반 이상을 잠수함 승조원으로 보냈다.
잠수함이 우리나라 군 전력으로 포함되었던 시기의 승조원을 1세대로 본다면, 나는 아마 2세대쯤 해당될 것이다.
1번 함은 독일에서 건조하였고, 미리 편성된 요원들이 파견되어 교육을 받은 후 인수해 왔었다.
이후 잠수함들은 대우조선소에서 국내 건조하였으며, 이를 기반으로 지금은 외국에 수출까지도 하고 있다.
잠수함을 운용하고 난 후 지휘부의 최대 고민거리는 ‘우수한 승조원들을 어떻게 모집하느냐?’였다.
왜냐하면 잠수함이라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도전, 위험하다는 인식, 열악한 근무환경 등에 대한 부담으로 자발적 지원 인원이 적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일정 기준 이상의 수상함 승조원을 차출 형식의 방법으로 모집하게 되었다.
나는 차출 형식의 방법으로 잠수함 승조원이 되었던 케이스였고, 차출 당시 해군사관학교에서 소령 계급장을 달고 생도 훈육을 담당하고 있었다.
1996년 9월 초에 시작된 잠수함승조원 양성과정 교육은 6개월 동안 계속되었는데, 워낙 생소한 교육이라 다시 소위 계급으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교육을 받는 사람들 중에 최고 선임이라서, 열성적인 교육 분위기를 조성해야 하는 책임까지 주어져 정말 쉽지 않은 기간이었다.
교육기간 중 실제 잠수함에 승조해서 실습하는 기회는 한 번 뿐이었고, 대부분은 모형 잠수함을 이용해서 실습이 진행되었다.
잠수함을 최초로 도입해서 운용한 국가임에도 인수요원들의 헌신적인 노력 때문에, 교육은 체계적으로 충실하게 진행이 되었다고 생각된다.
6개월의 교육 기간은 순식간에 지나갔고 교육받았던 모든 승조원들은 첫 부임 명령을 받고 뿔뿔이 흩어졌다.
나는 독일에서 인수했던 장보고함의 무장을 책임지는 보직으로 부임을 했다.
교육을 같이 받았던 후배 1명과 함께 부임을 했는데, 장보고함은 하와이 미국 잠수함기지에서 한 달간 교육을 받고 훈련에도 참가하기 위해 출항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잠수함 도입 이래 처음으로 하와이까지 잠항 항해하는 것이라서, 지휘부에서 긴장하고 준비상태를 지켜보고 있었다.
본래 새로운 보직자가 오면 기존의 보직자는 전출 가는 것이 정상이지만, 최초의 장거리 항해라는 무게와 중요한 보직이라는 점이 고려되어 같이 타고 가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좁은 잠수함 사관실은 많은 장교들로 숨쉬기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여러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장기간 수리를 마친 후의 시운전, 그리고 몇 차례의 실전 같은 훈련을 모두 끝내고 출항 전날을 맞이했다.
그 무렵 아내는 둘째 아들을 임신한 상태에서 막바지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나는 삼 형제 중 장남으로 자랐기 때문에, 아들만 있는 집의 삭막하고 무미건조함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느지막이 여동생이 태어나고 난 후, 한 곳으로만 시선이 고정된 아버지의 모습과 확 달라진 집안 분위기도 기억하고 있다.
덕분에 삼 형제들은 자유시간이 많아져서 좋았지만, 뭔가 소외된 것 같은 씁쓸한 기분은 떨칠 수 없었다.
나는 이런 분위기를 알았기에 결혼을 하면 딸을 낳겠다는 생각이 너무도 컸다.
하지만 의도와는 다르게 첫째는 아들이었다.
둘째는 심기일전해서 딸을 낳겠다는 욕심에 의도적으로 3년의 터울을 두고 임신했었고, 모든 것이 큰아들 때와는 다른 분위기여서 거의 딸이라는 확신을 가졌었다.
하와이로 출항하는 날, 아내는 산만한 배를 부여잡은 채 큰아들 손을 잡고 부둣가로 환송을 나왔다.
나는 출항할 때 무의식적으로 손은 흔들고 있었지만, 내가 없이 고생할 아내가 안쓰러워 기분이 무척 음울했었다.
장보고함은 하와이를 가면서 괌을 경유하도록 계획되었었는데, 10일 후에 입항해서 3일 동안 정박하는 것이었다.
안타까운 마음에 계산해 보니, 다행히 괌에 정박하는 3일의 기간 중에 출산 예정일에 포함되어 있었다.
10일간 항해 후 괌에 도착하자마자 전화를 해보니 아직이었고, 다음날 또 다음날도 아직이었다.
출항하는 날 전화를 하니 장모가 전화를 받으면서 “김서방! 기뻐하게, 아들이네.”라고 하였다.
아마도 장모는 내가 아들을 기다렸다고 생각해서 인지, 내 기분과는 다르게 목소리가 들떠 있었다.
사건은 출항하고 난 후 점심식사에서 발생하였다.
함장이 나에게 “순산을 축하하네. 그래 뭐가 나왔어?”하고 물었다.
나는 “예, 아들입니다.”하고 대답했다.
여기까지만 했으면 아무 문제가 없었는데, 나는 그만 분위기 파악을 못하고 사족을 달고 말았다.
말하지 말았어야 할 사족은 “딸을 낳고 싶었는데, 아들이 나와서 아쉽습니다.”였다.
갑자기 분위기가 어색해지면서 부장이 화제를 급하게 다른 것으로 돌렸다.
나중에 다른 장교를 통해서 들은 이야기는 “함장은 아들을 낳고 싶었는데, 딸만 둘을 낳아서 포기했다”라는 것이다.
정말 나의 신중하지 못한 경박함을 원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날 이후 왠지 함장이 나를 대하는 분위기가 서늘한 듯 느껴졌고, 함장이 먼저 장보고함을 떠날 때까지 시원하게 인정받지 못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 보면, 함장하고의 관계가 소원해졌던 것이 꼭 그 말 때문만은 아니었다.
하지만 안 그래도 교육받고 처음 부임한 것이라 미덥지 않은 면이 있었는데, 상황을 안 좋게 만든 것은 분명해 보였다.
지금이야 아들들이 믿음직스럽게 자라줘서 더 바랄 것이 없는데, 혹시 아들들이 이 글을 읽으면 서운할 수도 있어서 조심스럽기도 하다.
하여튼 한참 지난 일이지만, 나의 감정만을 생각하고 쓸데없는 말을 했던 그때를 생각하면 헛웃음이 나온다.
‘말이 많을수록 쓸 말보다는 버릴 말이 더 많은 것이고, 말은 필요한 말을 적절한 시기에 필요한 만큼만 해야 하는 것'이 진리임을 진즉에 알았다면 좋았을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