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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버티기 Mar 22. 2023

그랬다면 어땠을까?

나는 인생의 절반 이상을 군(軍)에서 보냈다.

그러다 보니 군 생활에 대해서 할 이야기가 많을 수밖에 없다.

군 생활은 이야기하기가 조심스러워지는 게 사실이지만, 이제부터 살금살금 다가가 보려고 한다.

그렇다고 ‘군대에서 축구한 이야기’는 아니니 걱정 마시라.     


내가 속해 있던 해군은 긴급상황 발생 시 대응을 신속하게 하기 위하여 바다와 접해있는 항구나 서∙남해에 있는 섬들에 많은 육상기지들을 구축해 놓았다.

지금 시작되는 이야기도 그중 하나인 서해 북단에 있는 섬을 중심으로 전개되며, 그 육상기지는 서해 북방한계선과 가까운 곳이라 북한 함정의 움직임에 따른 대응태세 유지를 위해 자주 긴급 출항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그곳에는 항상 고속정 편대가 전개하는데 그 당시 세 척의 고속정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섬이라 부두 여유가 많지 않아서, 출항했다가 들어오는 순서에 따라 세 척이 나란히 계류하곤 했다.

만약 작전상황에 따라 긴급출항을 하게 되면 제일 외곽에 있는 고속정이 가장 먼저 출항을 해야 연속적으로 출항이 가능한 것이다.     

그 섬에 전개하면서 수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두 가지만 언급할 예정이고, 시점은 30년도 더 된 199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겨울 끝자락 어느 날, 고속정의 승조원들은 여느 날처럼 꽉 짜인 오전 일과를 마치고 육상기지에 올라가서 점심식사를 하고 있었다.

고속정은 단기 작전임무를 주로 하기 때문에 자체 조리시설이 되어있지 않아 부득불 육상기지까지 올라가서 식사를 해야만 했다.

이제 막 배식이 되어 따뜻한 국을 한 숟가락 뜨고 있는데, 부두에 있는 고속정에서 사이렌이 울리기 시작했다.

고속정의 통신 당직자들이 상부로부터 긴급출항 지시 전문을 받고 승조원들의 긴급복귀를 알리는 사이렌을 울렸던 것이다.

승조원들 모두 식사를 본격적으로 시작도 못해보고 부두로 달려가 제일 외측에 있는 고속정부터 출항하기 시작했다.

전속력으로 상부 전문에 의한 지시점을 향해 달려갔지만, 잠시 후 긴급상황이 해제되어 부두로 복귀하게 되었고 승조원들은 다시 육상기지로 이동해서 식사를 시작했다.

막 식사를 시작할 무렵, 또다시 부두의 고속정들이 일제히 사이렌을 울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그날 승조원들은 네 번의 긴급출항을 하였고, 결국 점심식사는 포기하고 1일 2식을 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해 초여름 어느 날, 부둣가에 안개가 가득한 날이었다.

그날도 육상기지에서 식사를 시작할 무렵이었고, 모처럼 고기반찬이 푸짐하게 나와서 군침을 흘리고 있었다.

부두에 있는 고속정에서 일제히 사이렌을 울리기 시작하자, 흔히 있었던 일처럼 숟가락은 잡아보지도 못하고 고속정으로 달려갔다.

내가 지휘했던 고속정이 제일 외곽에 계류하고 있어 가장 먼저 출항해야 했고, 곧바로 상부에서 지정해 준 지시점으로 달려갔다.

전속력으로 달려간 지시점 근처에는 예인선과 같은 작은 배가 있었다.

그 배는 우리 측 최북단의 큰 섬으로 접근하다 우리가 접근하는 것을 보자, 갑자기 항로를 북쪽으로 변경하여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전속으로 도주하고 있었다.

우리는 전투배치를 한 상태에서 상부에 상황을 보고하고, 그 배의 주위를 돌면서 지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편대장이 승조한 고속정과 나머지 한 척은 지원태세를 유지한 채 거리를 두고 있어서,  단독으로  그 배에 대한 경계임무를 수행하는 것이나 마찬가지 상황이었다.

나는 외부로 노출된 함교에서 지휘를 하고 있었는데, 그 배의 승조원으로 보이는 사람이 황급히 실탄을 들고 나와 그 배 함수에 유일하게 설치된 기관단총에 장전하는 모습을 가까이서 지켜보았다.

우리는 여차하면 발사할 수 있도록 준비된 모든 포들을 그 배로 조준한 상태에서, 계속 주위를 원형으로 돌면서 상부 지시를 기다렸으나 별다른 행동지시가 없었다.

그러다 거의 북방한계선에 다다르자 상부에서 ‘긴급남하’ 지시가 내려와 남쪽으로 신속하게 항해하였고 상황은 종료되었다. 

훗날 들은 바로는, 그 배는 북한의 예인선이었고 고위급이 승선해서 낚시를 즐기고 있었는데, 안개로 인한 항로착오를 일으켜 북방한계선을 넘어 우리 섬으로 접근했었다고 한다.     


고속정은 유사시 최전방에서 가장 먼저 적과 조우하는 전력으로 크기는 작아도 가성비가 좋고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나는 대위 계급장을 달고 고속정 정장으로 1년 6개월 근무하면서 수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여기서 언급한 상황은 대표적으로 기억나는 것이다.

첫 번째 상황은 식사도 못한 채 반복을 계속해야 되는 피곤한 일이었지만, 그래도 참으면 해결되는 것이어서 문제 될 것은 없었다.

문제는 두 번째 상황이다.

지금도 머릿속에는 그때 상황을 복기하면서 '좀 더 현명하게 행동할 수는 없었는가?' 하는 생각을 한다.    

그때는 시기적으로 제1차 남북고위급회담이 성사되기 직전 상황이었으며, 남북 상호 간 군사적 긴장을 꺼려하는 분위기였다.

이제 지나고 나서 생각해 보면, 그 당시 지휘부에서 고속정에게 강한 대응을 지시하는데 많은 고민을 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한 고민은 북방한계선 가까이 갈 때까지 끝나지 않았던 듯하다.

하여튼 결과적으로 우리는 그 배의 주위만 돌다가 상황이 끝나게 된 것이다.

그때 당시도 결과를 놓고 대응을 잘했다는 의견과 못했다는 의견으로 나뉘었던 기억이 나고, 남북간의 정치적인 이슈에 묻혀 그냥 지나갔었다.

나는 가끔 상상을 해 본다.

'만약 상부 지시에 관계없이 그 배를 충돌하거나, 포격을 가했서 나포를 했다면, 그랬다면 어땠을까?' 


서해 북방한계선을 사이에 두고 반복하여 조성된 이 같은 군사적 긴장상태는 1973년 이후부터 시작되어 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앞에서 언급한 두 번의 상황은 1990년에 일어났으니까 그로부터도 30년 넘게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지금도 남북 대치의 상황은 변하지 않았고 오히려 북한의 핵무기 개발로 인해 경직성은 더 심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오늘도 그 섬에는 고속정 승조원들이 일촉즉발의 긴장감 속에서 훈련과 정비를 하면서 보내고 있을 것이고, 밥 숟가락을 들다마는 일을 반복하고 있을 것이다.

지금도 변함없는 북한으로 인해, 내가 33년 전에 했던 그 일들을 지금도 젊은이들이 그대로 반복하고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 개탄스럽고 화가 나기까지 한다.

현재의 남북관계에 변화가 없는 한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인내와의 싸움을 계속하고 있게 될 것이다.

그래도 모든 것을 감내하고 그 자리를 꿋꿋하게 지켜나가는 후배들이 자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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