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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버티기 Apr 13. 2023

인생 최고의 고통을 맛보다

신체적 고통 중 가장 통증 지수가 높은 것은 CRPS(복합부위통증증후군)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것은 통증 위치, 강도, 두려움 등 설문조사 내용을 가지고 통증 지수화한 것으로, 일반적인 자료로 제시할 수 있을 지는 몰라도 고통의 정도를 정확하게 나타냈다고는 볼 수 없다.

통증은 다분히 주관적이고 감정적인 요인이 많아서 지속성, 환경요인, 치료 기대감 등에 따라서 개인별로 느끼는 통증을 느끼는 강도는 달라질 가능성이 많다.

내가 난데없이 통증 지수를 언급하는 이유는, 함정에 근무하면서 있었던 인생 최고의 통증이라고 말할 수 있는 두 번의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함이다.     


1988년은 올림픽이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개최된 역사적으로 중요한 해였다.

그 당시 나는 기뢰 탐지와 제거 임무를 수행하는 소해함의 부장 직책을 맡고 있었다. 

부산 수영 만에서 요트경기가 개최되었는데, 두 척의 소해함들이 요트 경기장으로 들어오는 상선이나 어선 등을 조기에 우회시켜 경기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두 척의 소해함은 임무명령에 의해 이틀 전에 부산으로 이동하여 정박한 상태로 사전 준비를 하였는데,

이 기간 중에 같은 임무를 수행할 예정인 소해함 장교들끼리 농구시합을 하게 되었다.

나는 농구시합을 마치고 함정에서 샤워를 하면서, 오른쪽 넓적다리와 생식기 사이에 조그만 뾰루지가 난 것을 아무 생각 없이 손으로 뜯어내고는 샤워를 마무리했다.

그런데 하루가 지나고 나니 그 위치에서 열이 나기 시작했고, 이틀째 되니 더 심해지면서 생식기 쪽으로 자리를 잡는 것이었다.

그 뾰루지가 넓적다리 부위에 위치했으면 전혀 문제 될 게 없었는데, 하필 생식기 쪽으로 자리 잡으면서 고통의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삼일 째는 출항을 해서 임무 수행에 들어갔는데, 그 부위가 곪기 시작하면서 통증이 밀려왔다.

생식기가 해면체 운동을 하는 특성 때문에 통증은 더 심했고, 함교에서 당직을 서는 내내 참고 견뎌야 했다.

당직근무를 마치고 잠을 자려고 누어도 통증은 계속되었으며, 당연히 쉽게 잠을 들 수도 없었다.

더구나 누었다가 일어날 때면 피가 아래로 쏠리면서 그 통증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하지만 부위가 부위인지라 누구에게 보여주지도 못하고 오로지 고통과 싸우며 버틸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꼬박 일주일을 버티고 입항해서 할 수없이 함장에게 보고하고, 어기적거리며 걸어 나가 부산시내에 있는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았다.

거기를 한참 쳐다보던 의사는 "부고환염으로 보이고, 더 심해지면 생식기능에 이상이 있을 수 있으니 치료를 빨리 받아야 한다."라고 했다.

나는 처음에 염증이 시작된 원인을 알고 있는데 부고환염으로 진단하기에 믿을 수가 없어서 다시 진해에 있는 군 통합병원으로 가기 위해 버스를 탔다.

당시 부산에서 진해 간 도로는 구불구불한 길이어서 버스가 달리면 좌우로 쏠리면서 엄청난 통증이 밀려왔다.

그런데 진해에 도착하고 나서 통증이 사라지고 뭔가 허전해서 확인해 보니, 그 부위가 쓸리면서 내용물이 밖으로 터져버린 것이다.

군 통합병원 의사가 진찰해보고 부고환염은 아니고 소독만 잘하면 될 것 같다고 하였다.

부산으로 복귀하면서 허탈한 마음으로 되돌아보니, 지난 십여 일간의 고통은 정말 끔찍했다는 생각이 들었고저절로 몸서리쳐졌다.

    

두 번째의 고통은 잠수함 부장으로 있을 때였다.

내가 탔던 잠수함은 한미연합 훈련에 참가했다가, 곧바로 출동임무를 수행하고 돌아오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그런데 출항한 다음 날부터 오른쪽 어금니 하나가 아프기 시작하는 것이다.

미국 잠수함, 수상함과 훈련하는 것이라 신경은 쓰이면서도, 점점 심해지는 치통도 참아내야 하는 고통의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결국 의무장에게 진통제를 달라고 해서 먹기 시작했으나, 초기에는 효과가 있다가 약효가 떨어지면 치통이 반복되고는 했다.

그렇다고 훈련이 지속되고 있는 상황에서 치통 때문에 빠진다고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극한의 고통 속에서 훈련을 마치고 이어진 경비임무 수행을 위해 이동하였지만, 치통은 멈출 줄 몰랐다.

이제는 극한의 치통으로 거의 얼굴 반쪽이 없어지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고통을 참으며 십일을 더 진통제로 버티고 진해로 입항하였다.

곧바로 치과에 가서 발치를 하니 고통은 사라졌지만, 문제는 진통제로 인한 후유증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의무장이 “이제 진통제가 하루치 남았다.”라고 했을 때 입항했으니, 거의 진통제로 장시간 연명한 당연한 결과였다.

그 후유증은 거의 한 달간 지속되었으며, 속이 메슥거리고 소화가 잘 안 되어서 고생했었다.

아직도 그때를 회상하면 살벌한 고통에 몸이 떨릴 정도의 기억으로 남아있다.    


나는 이 두 번의 신체적 통증을 ‘인생 최고의 고통’이라고 언제든 말한다.

그 통증은 정박해 있었다면 별 문제가 없었지만, 출동한 함정이라는 특수한 환경과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는 시기가 맞물려서 겪게 된 정말 특별한 경험이었다.

두 번 다 부장이라는 중요한 직책을 수행하면서 일어난 일이었는데, 나름대로 통증을 참아내면서도 임무수행에는 지장이 없도록 노력했던 것이 오래 기억에 남는다.

나는 이때 이후로 웬만한 통증에도 견뎌낼 수 있는 내성이 생겼다.

이것을 ‘인생 최고의 고통’을 겪고 나서 주어지는 혜택이라고나 할까?

위대한 철학자 니체는 ‘나를 죽이지 못한 것은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든다.’라는 말을 남겼다.

나는 “나를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든다.”라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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