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인생을 살다 보면 맞이하게 되는 중요한 시기가 있다.
흔히 터닝포인트라고 말을 하는데, ‘어떤 상황이 다른 방향이나 상태로 바뀌게 되는 계기 또는 그 지점’을 말한다.
즉, 인생의 반전이 일어나는 변곡점이라고도 한다.
나는 여기에 또 하나를 추가하고 싶다.
그것은 초크포인트이며, ‘대형상선이나 군함이 반드시 지나가야 하는 해상의 주요 길목’을 말하고 우리나라의 경우는 말라카 해협이 있다.
인생에 있어서는 어렵지만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길목을 말한다.
나는 이 두 가지 포인트가 중3 때였다고 생각한다.
진해에서 계약직공무원으로 근무하던 중, 휴가를 얻어 지병으로 고생하던 원주의 어머니를 보러 갔었다.
어머니를 보고 서울로 가는 도중, 갑자기 중 3 시절을 보냈던 부론이 가고 싶어졌다.
내 인생에 있어 긍정적인 작용을 했던 시기라는 생각을 항상 해왔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때가 2018년이었으니까, 40년도 더 지난 부론이 어떻게 변했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원주를 벗어나 문막까지 가는 길은 많이 달라져 있었다.
‘여기도 세월이 가니까 발전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가다가 부론을 들어섰는데, 그야말로 옛날 모습 그대로여서 깜짝 놀랐다.
듬성듬성 움푹 패어있어 버스가 춤을 추며 지나다녔던 마을 큰길이 포장이 되어있는 것, 큰 강을 가로지르는 괴물 같은 다리가 놓아진 것만 눈에 띄었다.
한편으로는 그대로의 모습이 그 시절의 회상을 빨리 불러올 수 있어 좋기는 했다.
부론은 남한강과 섬강이 합류되는 지점으로 강원도, 충청북도, 경기도가 접경을 이루고 있는 특이한 곳이다.
이런 지리적 이점 때문에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 후기까지 원주 일대에서 거두어들인 세곡을 모아 경창으로 운송하던 ‘흥원창’이라는 조창이 있을 정도였다.
부론(富論)의 지명 유래도 ‘부를 논하는 마을’ 일 정도로 부유했고, 정치적인 식견이 많은 사람들이 많아 고을 원이나 감사가 이들과 의논하여 정치를 하였다고 한다.
이런 화려한 역사의 부론이 40년이 지나도 별로 달라진 게 없다니, 지명의 무게를 무색하게 만들고 있었다.
나는 중학교를 두 군데 다녔다.
2학년까지는 태백에서 3학년은 바로 이곳 부론에서 다녔다.
부론은 원주시내 초등학교로 진입하려는 아버지가 잠시 숨 고르기 위해 택한 곳이었고, 다음 해에는 그 뜻을 이룰 수 있었다.
그런데 2년을 다닌 태백에서의 기억은 거의 사라졌지만, 1년만 있었던 부론은 좋은 기억이 많이 남아 있다.
그 좋은 기억이란 게 친구들과 잊을 수 없는 추억 같은 것이 아니고, 내 인생에 있어 짧지만 강한 모멘텀으로 작용했다는 기억이다.
그야말로 나의 인생에 있어 중요한 포인트가 있었다는 것이다.
첫 번째의 좋은 기억은 아버지가 선생님이라 학교 관사에 거주하게 되면서 학교에 있었던 도서실에서 거의 살다시피 했다는 것이다.
휴일이면 공부하러 간다는 핑계를 대고 도서실에 틀어박혀 수많은 책을 읽곤 했다.
초등학교 도서실이라 중 3이 읽을 수 있는 책이 한정되어 있었다는 것이 아쉽기는 했지만, 전에 다녔던 중학교에서는 엄두도 내지 못했던 그야말로 획기적인 변화였다.
책을 통해 얻은 것은 구체적으로 표현할 수 없지만, 인생 전반에 걸쳐 좋은 영향을 끼친 것은 분명하게 알고 있다.
그리고 지금 이나마 글이라고 쓸 수 있는 기본 소양을 갖추게 만들어준 정말 소중했던 시간이었다.
두 번째는 카리스마가 넘쳤던 수학 선생님과의 만남이었다.
그는 항상 소나무의 옹이가 들어있는 짧은 막대기를 들고 다니면서, 문제를 풀지 못하면 여지없이 머리를 쥐어박고는 했었다.
어쩌면 강압적인 교육방식이었지만, 질문하는 것을 무척 좋아했고 질문한 학생에게는 각별한 애정을 보여주었다.
나는 질문을 통해 선생님과 가까워졌고, 수학에 맛을 알아갔던 시기였다고 생각된다.
수학과 친해지게 된 것은 상위학교로 진학할 때 계속 좋은 결과로 나타났고, 최근에 전기기사 시험에도 많은 도움을 주기도 했다.
세 번째는 큰 강이 있었다는 것이다.
경기도, 충청도와 맞닿은 강원도 끝자락에 남한강이 도도히 흐르고 있는 지역이었다.
여름이면 충청도와 경기도에서 온 학생들과 번갈아 가며 강에서 수영을 하고 놀았다.
그전까지 거주했던 곳은 탄광촌이 있는 산중이라 작은 하천만 있었고, 그마저도 검은 물이 흐르고 있어 수영은 엄두도 내지 못했었다.
이것은 훗날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하기 위해서 필수적으로 따야 하는 수영 인명구조 자격증을 남들보다 훨씬 빠른 2학년 때 딸 수 있도록 만들어준 원동력이었다.
실제로 동기생 중에 수영 때문에 졸업하지 못하고 중도에 탈락한 친구들이 꽤 있었다.
이제 내가 중요한 길목이라고 주장하는 초크포인트인데, 그것은 원주고 진학이다.
그때만 해도 반드시 시험을 치러야 입학할 수 있던 시기라, 고등학교를 어디로 진학했다는 것은 인생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고 볼 수 있다.
원주고는 강원도에서 춘천고 다음으로 진학하기 어려운 학교여서, 부론이라는 변두리에서 진학한다는 것은 언감생심이었다.
시험 보러 원주 가는 날, 버스 첫차를 타고 마을을 벗어날 무렵 수험표를 가지고 오지 않은 것을 알고 기사에게 통사정해서 집까지 뛰어갔다 왔었다.
아마도 내 생애 가장 빨리 달렸던 것으로 기억되고, 돌아올 때까지 이해하고 기다려준 버스 기사와 다른 손님들의 진득함이 어우러져 합격할 수 있었다.
원주고 합격은 학교에서 한 명 뽑았던 금오공고를 가지 못했다고 아버지에게 온갖 설움을 당하던 것을 일거에 날릴 수 있었던 쾌거였다.
아버지의 강요에 못 이겨 시험을 보았던 해사의 합격보다도 더 중요한 초크포인트였다고 생각한다.
이렇듯 중 3 시절을 보냈던 부론에서의 1년은 내 인생에 있어서 터닝포인트와 초크포인트를 동시에 지났던 시기였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좋은 기억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동창들과의 교류나 모임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아마도 세 도(道)에서 모인 친구들이 뿔뿔이 흩어지면서 지역에 있는 고등학교로 진학하면서 서로 멀어졌던 것으로 생각된다.
아니면 1년만 있었던 내가 고향 친구끼리 어울리는데 끼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누구나 자신의 삶에서 중요한 포인트가 있다.
앞만 보고 달려온 인생을 한 번쯤은 뒤돌아보며, 오늘의 나를 있게 한 때를 회상해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어쨌든 나의 인생에 있어 중요한 시기를 보낸 부론에, 최근 산업단지를 조성하겠다는 계획이 추진 중이라니까 지명의 화려함에 걸맞은 발전이 있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