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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버티기 Feb 06. 2024

이해는 다정한 용기를 준다

나는 이 년이라는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을 버텨야 한다. 다음에 가야 할 전기기사로서의 여정도 또한 '액티브 시니어'로서의 도전이겠지만, 지금 같은 강행군의 근무형태는 확실하게 벗어날 수 있을 것 같다. 이제 십육 개월의 시간이 힘겹게 지나가고 있다. 지금껏 살아오며 지시하고 보고 받는 생활에 익숙했던 내가 가장 말단의 위치에서 직접 실행해야 하는 일은 버거웠다. 몸에 밴 수동적인 관습 때문에 어렵기도 하지만, 감정적 소모를 견디는 것은 더 힘들었다. 경험이 없다는 이유로 으레 무시당하는 것이 다반사였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럭저럭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윗사람이 결정적인 순간에 내게 해준 이해가 바탕에 깔린 말들이었다. 이젠 제 몫을 감당해야 할 시기임에도, 또 결정적인 순간에 이해가 바탕에 깔린 말을 듣는 안타까운 일이 있었다.   


아침에 근무 교대를 하면서, 내 수준에서 묵직한 일을 인계받았다. 세대 내에 설치된 샤워기 수전을 교체해야 된다는 것이다. 전에 살던 사람이 별도로 설치해 쓰고 있던 좋은 수전시설을 새로 입주한 사람이 원래 설치되었던 것으로 교체해 달란다. 이유는 '찝찝하기도 하고 온수가 잘 나오지 않는다.'라는 것이다. 전임 근무자가 직접 교체해 주려고 했는데 입주민이 일정을 이유로 굳이 오늘 해달라 했다 한다. 나는 한 번도 내 손으로 수전을 교체하거나 옆에서 지켜본 적도 없었다. 이제 어쩔 수없이 생애 처음으로 수전을 교체해야 하는 대 작업을 앞두게 되었다. 윗사람이 "혼자 있겠냐?라고 물었다. 솔직히 자신은 없었지만, '까짓 거 매뉴얼 보고 하면 되지.' 하는 생각으로 "해 볼게요."라고 대답했다.


나름 필요할 것 같은 도구를 챙겨 약속된 시간에 세대로 올라갔다. 일단 세대로 들어오는 급수를 차단했다. 그런데 현장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복잡했다. 수전에는 부수적으로 붙어있는 것들이 많았다. 그것들은 철거하는데 예상보다 많은 시간이 걸리게 만들었다. 이제 새로운 수전 설치만 하면 되는데, 냉수 배관의 고정상태가 불량한 것이 보였다. 아마 이전 수전설비를 설치할 때 방치한 것 같았다. 어렵사리 배관을 연결하고 나니 혼자 결정하기 힘든 난관이 보였다. 샤워기로 올라가는 배관의 위치를 옮겨야 했는데, 그러면 거울의 중간에 위치해서 쓰기에 불편해질 것 같았다. 할 수 없이 윗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윗사람과 같이 거울을 떼어내고 배관의 위치를 옮겨서 설치했다. 이제 급수를 시켜 냉온수 공급 상태를 확인했는데, 수전 연결부위에서 물이 흘러내리는 것이다. 윗사람이 내 얼굴을 쳐다보며, "조립을 잘한 겁니까?" 한다. 


윗사람은 빠른 동작으로 다시 분해하기 시작했다. 결국 발견된 원인은, 내가 수전에 끼워야 할 고무패킹을 다른 곳에 끼워놓은 것이었다. 냉수배관 고정상태 보완부터 재작업을 해서 많은 시간이 경과된 후 마무리가 되었다. 이럴 바엔 처음부터 같이 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후회가 되었다. 윗사람과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면서 계면쩍게 "괜히 저 때문에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하고 말했다. 윗사람 왈, "경험해보지 않으면 다 그렇지요. 좋은 실습 하셨네요."라고 했다. 급수 시험 하면서 수전 연결부위에서 물이 샐 때부터 엄청나게 불편했는데, 이 말 한마디에 모든 불편함이 녹아내렸다. 근무한 지 일 년이 넘도록 나의 어처구니없는 일처리의 전력은 화려했다. 매번 뒷마무리를 전담해야 하는 윗사람의 짜증 섞인 반응이 나올 만도 한데, 언제나 절제된 표현으로 일관한다.  


며칠 후, 윗사람이 나에게 쫓아왔다. 내가 다음 주에 신청한 연차를 미뤄주기를 부탁하였다. 다음 주에는 많은 입주가 계획되어 있어 혼자서 감당하기에 벅차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솔직히 연차를 미루기가 어려웠다. 모임의 다른 사람들에게 양해를 받아야 하는 불편한 과정이 기다리고 있어서다. 하지만 내가 감정적 소모가 있을 때 해주었던 윗사람의 이해가 바탕에 깔린 말들이 생각났다. 그리고 그가 내가 없이 혼자 동분서주할 모습이 충분이 연상되었다. 그래서 흔쾌히 "예, 연차를 바꿀게요." 하였다. 이번 일을 겪으면서 이해해 주고 이해받는다는 것이 소통의 핵심이라는 생각이 든다.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이해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존재를 감사하게 생각하고 배려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깊고 넓어, 그 의미의 크기를 가늠할 수 없다. 누군가를 진정으로 이해할 수만 있으면 편견도 극복할 수 있는 굳건한 관계가 가능하다. 그래서 이해는 다정한 용기를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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