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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버티기 Feb 13. 2024

자세히 보면 관점이 넓어진다

퇴근길은 가볍고 출근길이 무거워야 정상인 것 같은데, 나는 그 반대다. 그렇다고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마냥 즐겁고 기대되어서도 아니다. 오늘은 또 무슨 일이 나를 곤란하게 할까 하는 약간의 긴장감이 항상 있으니 말이다. 그래도 집을 나와 마을버스를 탈 때부터 흥분되기 시작한다. 그 이유가 뭔지 생각해 보니 두 가지가 떠오른다. 먼저, 글을 쓰고 읽을 수 있다는 것이다. 공용구역 작업이나 세대민원 해결하는 시간을 제외하고 남는 시간은 순수하게 내가 컨트롤 가능한 시간이다. 하지만 쉬는 날 집에서는, 나를 기다리고 있던 분(?)과 어울리다 보면 온전히 혼자 시간을 보내는 것은 엄두를 낼 수 없다. 다음으로 들 수 있는 것은 출근길의 역동적인 모습들을 관찰할 수 있고, 나도 그중의 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직장 근처 전철역에 내리면, 운동도 할 겸 어김없이 십 여분 간 골목길을 산책하며 관찰에 집중한다. 이제부터 할 이야기도 관찰하면서 만난 사람들과 관련된 것이다.


산책길의 첫 번째 꺾어지는 골목 어귀에서 항상 한 남자를 만난다. 그는 선천적인지 사고였는지 알 수 없지만, 한쪽 다리를 절고 있다. 나이는 칠십대로 보인다. 그리고 한겨울엔 어울리지 않는 얇은 옷을 입은 채, 양손에 작은 물병을 들고 있다. 아마도 아령 대신 운동기구로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짐작된다. 그의 집은 예전에 구멍가게였던 듯, 간판엔 먼지가 자욱하고 페인트 칠이 벗겨져 있다. 지금은 장사를 접고 가끔 가게 앞쪽에 과일만 놓고 팔고 있다. 유리로 된 출입문 너머로 정리되지 않은 박스들과 이불이 널브러져 있는 침대가 보인다. 이불이 개어져 있는 것은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그런 모습을 보면 방이 따로 없이 그 공간에서 먹고 자는 듯하다. 한 번도 다른 가족이 같이 있는 것은 보지 못했다.


가끔 골목길에 주차해 놓은 차량의 차주 전화번호를 확인해서 전화하는 모습이 보인다. 자발적으로 하는 것은 아닌 것 같고, 골목 내 주차 통제 일도 맡아서 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럴 때면 성하지 않은 다리로 절룩거리며 골목 여기저기를 쏘다니는 모습이 안쓰럽다. 그래도 본인은 골목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정감 있게 인사를 하고 밝은 모습으로 대화도 하고 있다. 일 년 넘게 매 번 출근할 때마다 보았는데, 어느 날부터 보이지 않았다. 가게 출입문은 계속 닫혀있고, 전등도 켜지 않아 어둡기만 하다. 그러고 보니 마지막 볼 때 안색이 별로 좋지 않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가족도 없는 것 같은데, 어디 아프기라도 한 건지 궁금했다. 혹시 쓰러지기라도 했다면 누가 병원으로 데려갔을까?  


출근 때 매 번 보았던 그 남자를 볼 수 없게 되니, 뭔가 루틴이 깨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불편한 몸에 양손엔 물병을 들고, 지나는 골목 지인들과 밝게 인사 나누는 모습에서 나도 힘을 얻었던 것 같다. 하지만 보지 못하게 되니, 골목은 더 차가운 바람만 지나간다. 나도 가게 앞을 지날 때면 쓸쓸한 감정에 한참 가게 안을 들여다보고 지났다. 북극의 찬기운으로 최강 추위라고 하던 날, 거의 한 달 만에 그가 나타났다. 그 남자가 다시 양손에 물통을 들고 가게 앞에서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여전히 추위에 걸맞지 않은 옷을 걸치고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뒷모습만 보여 표정을 볼 수는 없었지만, 거동이 불편해 보이지는 않았다. 불현듯 "어디 아프셨습니까?" 하고 물어보고 싶었다. 그래 그동안 통성명도 없었지 하는 생각이 들어 그냥 발걸음을 옮겼다. 아프면 안 됩니다. 아프면 안 됩니다. 아프면 안 됩니다..... 걸어가며 계속 되뇌었다.


한 블록이 떨어진 골목에서는 한 여인을 만난다. 그녀는 골목의 몇 개 건물 청소를 하는 듯했고, 나이는 육십 대 중반 정도로 보였다. 한 번은 이쪽, 한 번은 저쪽 건물에서 청소하는 모습이 보인다. 지나며 볼 때마다 깡마른 체형이지만 걸음이 힘 있고 빠르다. 자신이 고안해서 만든 것 같은 청소용구 벨트를 매고, 머리엔 두건을 두른 모습에서 완전무장한 군인의 포스가 느껴진다. 그녀가 타고 다니는 경차에는 청소 용구가 한가득이다. 골목을 빠져나갈 때 보면, 그녀가 보이지 않을 정도다. 하나의 건물을 청소하는 것도 벅차게 느껴지는데, 몇 개의 건물을 혼자서 감당하는 것을 보면 범상치 않은 경험의 소유자 같다.


한 건물의 청소를 마치면 건물 사이에 있는 수돗가에서 청소 용구를 세척한다. 그럴 때마다 '내가 이제까지 보지 못했던 청소 용구가 이렇게 많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가끔 건물 입구에서 청소하는 모습을 보면, 프로의 숙련된 손놀림이 남다르다. 그런 모습을 보며, '얼마나 오랫동안 했을까? 하는 궁금증이 들기도 한다. 종종 건물에서 나오던 사람들이 그녀를 깍듯하게 대하는 모습에서, 비록 청소는 하고 있지만 위상이 느껴진다. 청소는 기본이고, 건물 내의 사람들과의 인간관계도 소홀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나는 그녀를 만날 때마다 프로의 풍미에 감탄한다. 언제나 행동에 거침이 없고, 인사할 때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 있다. 일 년여를 보았지만, 한치의 흐트러짐을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녀를 닮고 싶다. 일 년이 지나도 물어서 해결하는 일이 절반이 넘는 아마추어가 아닌, 머릿속에 업무처리 매뉴얼이 살아 숨 쉬는 프로가 되고 싶다. 그녀를 보고 나면 롤 모델을 본 듯, 가야 할 방향이 보이고 의지가 솟는다. 그녀가 오랫동안 그 골목을 꿋꿋하게 지키면서, 나에게 힘을 주는 존재로 남아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오늘도 바쁜 걸음으로 힘 있게 걸어가는 그녀를 지나치며, 오래 건강하세요. 오래 건강하세요. 오래 건강하세요...... 마음속으로 기원했다.  


나는 출근길에 골목길을 돌아 산책하는 시간을 소중히 여긴다. 눈이 오든, 비가 오든 그리고 최고로 추워졌다고 호들갑을 떨어도 한 번도 거른 적이 없다. 그리고 지나치는 출근길의 모습들을 세심하게 관찰하는 즐거움을 즐긴다. 그 남자는 불편함을 안고 외롭게 살아가면서도 밝은 삶의 의지를 보여 주고 있다. 불편함 없이 가족들의 응원 속에서 출근하고 있는 나에게 은근한 자극을 준다. 그 여자는 가냘픈 체형임에도 전사 같은 모습으로 골목길을 정리하고 있다. 노련한 스킬을 발휘해서 정해진 시간 내에 평정해 나가는 비범함에 늘 감탄하고 있다. '삼인행 필유아사(三人行 必有我師)'라 하지 않았나. 자세히 보면 도처에 스승이 있다. 그냥 무심결에 지나치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자세히 보면 보이고, 또 관점이 넓어지는 것을 늘 체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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