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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버티기 Jan 23. 2024

우리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까?

군(軍)에서 근무 인연으로 친하게 지내오던 후배들과 관계가 소원해졌다. 후배들과는 십 년 전에 각 군이 같이 근무하는 합동부서에서 우여곡절을 함께 했었다. 해군인 나와는 달리 그들은 공군과 육군 장교였다. 비록 직급은 과장과 담당의 관계로 있었지만, 근무 시 호흡은 물론이고 인간적 교감도 밀접했다. 내가 진해에 근무할 때도 둘이 같이 서울에서 진해까지 다녀가곤 했다. 내가 진해 근무지에서 퇴직하고 서울에 정착한 후, 먼저 서울에서 거주하던 그들과 곧잘 만나서 정을 나눠왔다. 이제는 그들도 군을 떠나 새로운 직장에서 근무하고 있어, 만나면 스스럼없이 형님 아우하면서 지냈다. 딱 작년 초까지는 그렇게 지내왔다. 문제가 발생된 것은 같이 근무했던 다른 후배 세 명도 함께한 자리에서였다. 


오랜만에 거의 다 참석하여 만들어진 자리는 흥겨웠다. 술도 몇 순배 돌면서 많은 이야기가 오갔다. 내 앞에는 그동안 많이 만나왔던 그 두 명이 앉아있었다. 그 둘은 속삭이듯 서로에게 말하고 있었지만, 내가 다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내게 들려온 대화의 주제는 정치적인 이야기였고, 특정 정파에 대한 비난과 조롱이 한참 이어졌다. 아마도 둘은 자주 만나서 그런 류의 이야기로 합을 잘 맞춰온 듯했다. 이제까지의 만남에서 한 번도 정치적인 이야기를 해 보지 않아서 그 두 명의 정치적 성향을 가늠할 수 없었다. 비록 두 명 만이 주고받으려는 대화였지만, 내 귀에 들린 말들로 그들의 정치적 성향은 분명히 인지할 수 있었다. 그 순간 나는 자리가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먼저 다 같이 모인 자리에서 둘이서 만 대화하는 것이 거슬렸고, 그리고 정치적 성향이 나와 다르다는 사실을 알았다는 게 당황스러웠다.


나는 그날 모임을 그냥 어정쩡한 채로 마무리했다. 그 모임 이후, 후배들의 만남 제의에 선뜻 응해지지 않았다. 거의 반년 이상을 가끔 전화 오면 소식을 주고받는 정도의 사이로만 지내고 있다. 그중 육군 후배는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음에도 말이다. 내가 같은 아파트로 이사 온 다기에 오기만 하면 부부동반으로 자주 모임을 가질 것처럼 떠벌였던 기억이 있다. 그 후배가 얼마 전 전화를 해서 부부 만남을 제의했는데, 선약이 있어 응할 수 없었다. 만약 선약이 없었어도 선뜻 응하는 걸 망설였을 것 같다. 나도 이런 감정이 전혀 이해되지 않는다. 정치적 성향이 다르다는 문제가 이렇게 큰 감정의 골이 생기게 하는지. 내가 하고 있는 행동이 과연 바람직한 것인가? 앞으로도 계속 똑같은 감정으로 그들을 대할 것인가? 


나는 정치적인 성향보다는 관계에서 오는 즐거움이 더 크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이런 경우를 맞닥뜨려 한 발짝 뒤로 물러나고 있는 내 모습을 보며 당황스러웠다. 사실 주변에서 이런 문제의 경험담을 이야기하면서 곤욕스러워하는 모습 많이 봐왔다. 인터넷으로 확인해 봐도 사례가 넘쳐난다. 삼십 년 지기도 그런 주제로 언쟁하다가 단숨에 관계가 깨졌다고 했다. 부모와 자식 간에도 멀어지게 되는 요인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심지어 부부관계도 멀어져 이혼을 고민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야말로 '정치성향이 다르면 밥도 같이 먹기 싫다.'라는 분위기가 만연되고 있었다. 우리의 일상 깊은 곳까지 파고들어 극단적인 정치 양극화 현상이 빚어지고 있는 것이다. 왜 우리 사회에서 정치적 성향이 사람 관계에서의 중요한 기준으로 자리 잡게 되었는가? 


한국 사회 및 성격 심리학회에서 2024년 한국사회가 가장 경계해야 할 심리현상으로 '확증 편향'으로 선정한 것을 보았다. '확증 편향'이라는 말을 들어보기는 했지만, 머릿속에 개념이 정확하게 들어와 있지 않았다. 그래서 왜 '확증 편향'을 경계해야 할 심리현상으로 들었는지 의문스러웠다. 자세히 들여다본 '확증 편향'은 '자신의 믿음에 근거한 정보만 받아들이고 반대되는 증거나 새로운 정보들이 나오더라도 그것들을 무시해 버리는 경향'을 말한다. 즉, 정보의 객관성과는 상관없이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 현상'이다. 그러니까 내가 후배들과의 관계에서 겪은 상황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사회 현상이었다. 이미 전문가들도 사회 갈등을 심화시킬 수 있는 현상으로 우려를 표명하고 있는 것이다. 


'확증 편향'이라는 말과 떼려야 땔 수 없는 말은 '인지 부조화'였다. "인지 부조화'는 '자신의 도덕적 가치관이나 생각에 배치되는 판단과 행동을 하였을 경우 또는 배치되는 사회현상을 발견하였을 경우 등에서 발생하는 불일치나 부조화로 인한 심리적 불편함을 표현하는 개념'이다. 사람들은 이런 심리적 현상을 맞닥뜨리면, 불편함을 초래하는 두 가지 중 하나를 수정하거나 제거하려고 노력하게 된다. 이 두 가지는 '자신의 도덕적 가치관이나 생각' 또 하나는' 배치되는 판단과 행동'이다. 만약 '자신의 도덕적 가치관이나 생각'에 변화를 줘서 불편함을 해소하려면 '자기 합리화' 과정을 거치게 된다. 그렇지 않고 '배치되는 판단과 행동'을 통해서 불편함을 해소하려면 이에 대한 증거를 부정하려는 '확증 편향' 과정을 거치게 된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늘 인지 부조화의 불편함을 겪고 있지만, 판단과 행동의 불편함을 아주 쉽게 '확증 편향'이라는 오류로 해소해 버리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되는 것이다.


정치적 성향은 '확증 편향'이 강하게 작용되는 분야라고 생각된다. 정치적 성향이 같은 집단은 끼리끼리 편향된 정보를 공유하고 소통하면서 허구까지도 현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결국 집단지성이 현실과 유리되면서 사회적 갈등과 분쟁이 증폭되고 급기야는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있는 것이다. 이게 지금 우리 사회의 분위기이고, 내가 겪고 있는 황당함과 갈등의 원인이기도 하다. 분명 그 후배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나도 '확증 편향'의 굴레 속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미 유튜브와 SNS에서 개별 사용자의 시청 기록 등을 바탕으로 콘텐츠를 추천하는 알고리즘이 작용되고 있음에도, 정치적 성향과 일치하는 뉴스 미디어만을 선호하고 유튜브를 선별해서 보고 있으니 말이다. 이미 서로 깊숙이 들어간 '확증 편향'의 늪에서 벗어나기는 힘들 것으로 느껴진다. 하지만 나는 그 후배들과 정치적 성향을 벗어나, 나이가 들어가도 편하게 만나는 사이로 남고 싶다. 


 우리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까? 현재의 상황에서 예전으로 돌아가기 위한 방법은, 우선 내 생각을 바꾸는 게 급선무 같다. 그들이 나에게 그들의 정치 성향을 강요한 것도 아니고, 둘이서만 공유한 것을 내가 들은 것뿐이다. 정치적 성향은 서로 '확증 편향'되어 있더라도 서로에게 이해시키려 강요하지 않는다면 문제 될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정치적 성향'이 많은 시간 정을 나눠온 '관계의 친숙성'을 뛰어넘을 수 없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리고 앞으로의 만남에서 '정치적 성향'은 이야기 주제로 끼어들 틈이 없도록 할 것이다. 그것 말고도 내가 그들에게, 그들이 나에게 들려줄 경험을 통해 얻은 인생이야기가 많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동안의 만남에서도 각자의 위치에서 겪는 진솔한 이야기로 시간 가는 줄 몰랐었다. 따뜻함이 그리워지는 겨울이 가기 전에 서로 간 따뜻함을 확인할 수 있는 만남의 기회를 만들어 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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