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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버티기 Jan 15. 2024

인생은 자극과 반응의 연속이다

아내와 같이 은근히 염려하고 있던 일이 현실로 다가왔다. 첫 직장에서 이제 6개월째 근무 중인 작은아들이 아내에게 슬쩍 불편함을 비췄단다. 얼마 전까지 웃음기 머금고 할 만하다고 했는데...  어쩐지 최근 보았던 얼굴에 그늘이 보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과 사람 그러니까 인간관계가 문제였다. 하는 일이 출장이 잦았는데, 출장지에 한 번 가면 며칠 동안 숙소에서 묵고 올라왔다. 출장지에서 일을 같이하고 숙소에서도 함께 생활해야 하는 사람이 문제의 중심에 있었다. 갈등의 원인을 속속들이 말하지 않았지만, 바로 그 사람이 이십 년이 넘는 윗 세대이고 깐깐한 성격의 소유자라는 말에 어느 정도 짐작은 되었다. 아마도 그 사람은 사소한 문제를 가지고 어른 티를 내면서 훈수를 뒀을 것이고, 작은아들은 자기중심적 생각을 바탕으로 반사적인 부정적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어쨌든 작은 아들은 반대편이 보이지 않는 높은 벽으로 인해 숨이 막혔고, 급기야 직장생활 전체에 대한 의욕도 흔들리게 된 것이다.


나는 갈등의 내막을 잘 알지 못하면서도, 걱정이 앞서 어쭙잖게  "한 사람 때문에 인생의 진로를 바꾸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다. 벽은 뚫고 지나가거나, 넘어서 가야 한다. 지금 너의 입장이라면 넘어가는 게 맞겠지. 넘어가려면 사다리를 놓거나, 발판을 몇 개 쌓는 방법이 있을 거야. 사다리를 구하거나, 발판을 만드는 일은 결국 네 몫이야. 그 사람의 입장에서 좀 더 고민하고, 새로운 관계개선 노력을 권고해 주고 싶다."라며 문자를 보냈다. "고민해 보겠습니다."라고 답은 왔지만, 마음에 갈라진 생채기를 아물게 하지는 못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차피 본인이 해결해야 할 직장 적응에 관련된 일이라고 치부하면서도, 한동안 머릿속에 머물면서 떠나지 않았다. 불편한 속을 달랠 수 있는 '소화제 같은 말을 해줄 수는 없었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인생의 선배로서 해줄 수 있는 말의 한계를 느끼며 고민하던 중, 잠수함 함장시절 출동 중에 읽었던 차드 멩 탄의 '너의 내면을 검색하라' 이라는 책의 한 문장이 생각났다. '자극과 반응 사이에는 공간이 있다. 그 공간에는 반응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와 힘이 있다. 그 반응에 성장과 행복이 달려 있다.' 솔직히 그 당시 책을 읽었다고는 하지만 정확한 의미를 몰랐다. 훗날 책을 읽을 때 해놓았던 독서메모에서 이 문장을 발견하고, 인터넷을 뒤적거리면서 그 의미에 대해 알아본 적이 있다. 아마도 그런 과정이 있었기 때문에 기억에서 되살아난 것 같다. 나는 이 문장에서 '자극', '반응' 그리고 '공간'이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에 집중했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작은 아들이 겪고 있는 인간관계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이 용어들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어렴풋하게 느낄 수 있었다.


이 유명한 문장은 '죽음의 수용소에서'로 유명한 빅터 프랭클이 한 말이다.  빅터 프랭클는 유대인 정신과 의사로서 나치 강제수용소에서 3년간 수감 생활을 했다. 그는 수감기간 동안 발견한 인간의 존엄성과 의지력, 인생의 의미 등에 대한 흥미로운 사실을 글로 옮겼다. 비참한 수용소 환경에서도 수용자들마다 생존하는 모습이 다르다는 것을 보았다. 배급되는 빵을 즉시 먹어치우는 사람이 있는 반면, 자신이 먹을 것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아껴 모아두었다가 남을 돕는 행동을 보이는 사람이 있었다. 또한 그날그날 비참하게 사는 사람이 있는 반면, 언제 가스실로 끌려가게 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도 아침마다 깨진 유리 조각으로 면도를 하고 뺨을 비벼서 혈색을 좋게 만드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여기서 중요한 사실을 발견했다. 이렇게 의미 있는 행동을 했던 사람들이 가스실에 끌려가는 명단에서 매번 제외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사람들은 자신만의 삶의 의미와 자신의 행동에 대한 선택권을 가졌던 것이라고 보았다. 똑같은 자극을 받았지만 그 사람들은 반응을 보이기 전 공간에서 선택의 자유와 힘이 달랐고, 결국 성장과 행복을 얻을 수 있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인생은 자극과 반응의 연속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매일 자극과 반응을 반복하고 있으며, 이것이 삶의 전부라고 볼 수 있다. 마치 개인이 자유의지에 따라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생각되지만, 가변적인 주변환경에 따라 반응하고 있는 것이다. 이 가변적 주변환경이 자극이다. 중요한 것은 자극은 선택할 수 없지만, 반응은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자극에 반사적인 반응을 선택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의식적인 반응을 선택하는 사람이 있다. 즉 반사적이고 직관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과 이성을 이용한 합리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으로 대별된다는 것이다. 이 같은 자극과 반응 관계는 인간관계에도 적용된다. 나를 힘들게 하는 상대방의 말과 행동과 같은 자극은 바꿀 수 없지만, 그에 대한 나의 반응은 다르게 바꿀 수 있다. 작은 아들이 상사로부터 오는 자극에 대해 반사적 반응보다는 이성을 이용한 합리적인 생각으로 반응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드는 대목이다.


사실 말이 쉽지, 이성을 이용한 합리적인 생각을 하기란 정말 어렵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극에 반사적으로 반응을 보이고 후회와 반성을 반복했던 경험을 가지고 있다. 나도 '그때 그렇게 하지 말걸' 하는 순간들이 부지기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똑같은 반사적 반응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주위 사람들의 말과 행동으로 자극을 받을 때마다 여과 없이 즉각 반응하게 되면, 결국 그것들에게 삶의 주도권을 빼앗기게 된다. 이걸 극복하려면 반사적인 반응을 줄이려는 부단한 노력이 있어야 한다. 이것은 수용력과 유연함이 충분한 마음의 공간을 만들어야 가능하다. 그래야 자극과 반응 사이에서 멈출 수 있고, 진정한 선택의 자유가 주어진다.


이제 작은 아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이 직장을 떠나 다른 곳에 가더라도 불편하게 만드는 사람은 항상 있게 마련이다. 네가 불편하다고 느끼는 것은 '나를 중심으로 사고하는 습성'이 길러져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불편함의 원인을 항상 상대에게서만 찾으려 하고, 나에게서 찾으려 노력하는 것에는 인색하게 만든다. 그래서 자극이 있으면 항상 반사적 반응을 보이게 되는 것이다. 이런 반사적 반응이 극복되지 않는다면, 계속 관계를 회피하려는 행동이 반복될 것이다. 이번 문제도 돌이켜보면 자극과 반응 사이의 공간이 좁아 반사적 반응을 보였기 때문에 빚어진 것이라 생각된다. 반응을 하기 전에 일단 멈추고 합리적 선택을 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 즉 자극과 반응 사이의 공간을 넓히고, 유연하게 수용할 수 있는 마음으로 공간을 채워놔야 한다. 결론적으로 '소화제' 같은 말은 없다. 인생의 주도권을 가지려면 일단 멈추고 진중하게 선택할 수 있는 충분한 '공간'을 확보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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