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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버티기 Feb 20. 2024

복병을 맞는 자세

인생이 생각대로만 살아진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런데 인생의 항로에는 수많은 '복병'들이 도사리고 있다. '복병'은 '예상하지 못한 뜻밖의 경쟁 상대'를 말한다. 이것은 고비마다 예상치 못한 순간에 나타나 순조로운 항해를 방해한다. 어떤 이는 이걸 잘 물리치고 계획된 항로로 순조로운 항해를 계속하는 반면, 또 어떤 사람은 당해내지 못해 배가 뒤집히거나 항로를 바꾸게 되기도 한다. 이순을 지난 이즈음, 나에게는 어떤 '복병'이 달려들었었나 생각해 본다.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잠수함 함장을 할 때의 기억이다. 통상 잠수함 하면 무기체계로서 가치만 언급하지, 그걸 운용하는 사람들의 애환과 고충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다. 나는 잠수함 함장으로 근무했던 이 년을 인생에서 손꼽는 소중하고 유의미한 기간으로 여기고 있다. 아직도 가끔은 노심초사하면서 승조원들과 문제를 해결해 나갔던 그 당시를 회상해 본다. 이 글은 마지막 출동이라는 고비에서 맞이한 '복병'에 관련된 이야기다.


잠수함 함장으로서 마지막 출동 경비를 나가는 날 아침은 흐렸다. 곧 눈이라도 흩뿌릴 것 같이 을씨년스러웠다. 작전 상황실의 브리핑에서도 기온은 낮고 눈이 내릴 것이라고 했다. 이 년 간의 함장 보직 기간 중 이런저런 일들이 있었지만, 이번 출동 결과에 따라 유종의 미로 마무리 될 수 있는지 여부가 결정되는 것이다. 오늘 바다로 나가면 한 달이 좀 모자라는 기간 동안 동해의 심연 속을 헤집고 다녀야 한다. 마지막 출동임을 아는 동기생과 후배들의 환송을 뒤로하고 잠수함에 올랐다. 잠수함은 후진하겠다는 기적소리를 울리며 부두와 점점 멀어졌다. '마지막'이라는 말은 단어 자체에 비장함이 잔뜩 묻어 있다. 여느 때 같으면 당직사관에게 맡기고 함교에서 내려갔는데, 좁은 수로를 거의 다 빠져나갈 때까지 함교에 있었다. 아름답게 표현한다면, '마지막 출동의 비장함을 다지는 시간'이었다.


잠수함은 일정한 수심이 되지 않으면 잠항할 수 없다. 그 한계 수심이 부산 앞바다쯤 된다. 또한 잠항해서 오던 잠수함이 떠오르는 구역이기도 하다. 바닷속은 항상 고요하다. 태풍이 불어 바다가 뒤집어져도 파도 높이 열 배의 수심에만 들어가면 잠잠한 평온상태가 된다. 부산 앞바다는 만만찮은 파도에 진눈깨비 날리는 겨울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찬찬히 안전 상태를 확인한 후, 해치를 닫고 내려와 잠망경을 보면서 '충수!'라는 조함 명령을 내렸다. 잠수함은 서서히 탱크에 물이 채워지면서 심연 속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함장을 'Last Man, First Man'이라고 한다. 잠수함이 수면에서 수중으로 잠항할 때 최종적으로 해치(Hatch)를 닫는 사람도, 수중에서 수면으로 떠오를 때 제일 먼저 해치를 열고 나오는 사람도 함장이다. 가장 위험 한 순간이 잠항하고 부상할 때여서, 함장이 안전에 대해 확인하고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이다.


포항 앞바다를 수중으로 지나고 있었다. 당직사관이 함장실을 두드리면서 다급한 목소리로 "함장님! 함 속력이 줄면서 심도가 내려가고 있습니다." 하는 것이다. 직감적으로 비상상황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전투정보실로 달려 나가 상황을 보니 당직사관이 보고한 그대로였다. 외부에서의 충격이 없는 상태에서 이런 상황이 발생하는 것은 어망 밖에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눈으로 보지 않은 상태에서 후진으로 빠져나가는 것은 정말 모험이었다. 후진 침로를 잘못 잡아 함미의 스크루에 어망이 감기면, 그야말로 옴짝달싹 못하고 구조를 기다려야 한다. 일단 속력을 정지시키고 함이 회두하는 방향을 보면서 어망에 걸린 형상을 머릿속으로 그렸다. 후진으로 빠져나가야 할 정확한 침로를 그려놓고 속력을 최대한 올려 빠져나갔다. 완전히 벗어나기까지 걸렸던 십 오분의 시간은 내 생애 몇 안 되는 가장 긴 시간이었다. 역시 '마지막'이라는 말은 결코 가볍거나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우리 잠수함의 적은 당연히 북한 잠수함이나 수상 함이지만, 무시 못할 적이 또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어민들이 깔아놓은 '어망'과 수중의 중층에서 떠 나니는 '폐 그물'이다. 잠수함을 운용하기 시작한 초창기에는 어구에 쇠를 많이 사용해서 음탐기로 소음을 듣고 피해 다닐 수 있었다. 점점 어구의 재질이 가볍고 강도가 센 플라스틱으로 바뀌면서 소음이 사라져 음탐기로 탐지가 불가능해졌다. 우리 잠수함이 어망에 걸려 곤욕을 치르고 구조된 사례가 한 번 있었지만, 인명피해는 없었다. 그런데 중국의 재래식 잠수함은 스크루에 어망이 걸리고 기관고장도 있어 승조원 70명 전원이 사망하는 비극적인 사례가 있었다. 잠수함이 수중에서 안전하게 항해하는 데 있어 어망과 폐그물은 분명히 '복병'이다. 그 '복병'을 마지막 출동에서 만난 것이다. 지금은 지나간 추억처럼 가볍게 이야기할 수 있지만, 그때는 승조원들의 생사를 가를 수도 있을 만큼 심각한 위기이기도 했다.


'복병'은 교묘하게 숨어있다가, 우리의 경계가 소홀한 틈을 노려 접근한다. 그래서 십중팔구 발목을 잡히고 넘어지기도 하지만, 그 과정을 통해서 훌쩍 커나가기도 한다. 나는 경험을 통해 '복병'을 만나면 스트라이크와 볼을 골라내는 타자처럼 선구안이 있어야 함을 알았다. 극복이 가능한지, 아닌지를 최대한 빠르게 식별해 내야 한다. 극복이 가능하다고 판단되면 신속하고 정확한 결심으로 헤쳐나가야 하고, 불가능하다면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방향으로 우회해야 한다. 내가 만난 '어망이라는 복병'의 경우도 극복은 가능했지만, 얼마나 정확하고 신속하게 결심하느냐가 중요했었다. 그 일이 추억으로 남느냐와 재앙이 되느냐는 오로지 자신의 결심에 달려있다. 그러므로 인생을 통해서 조우하게 되는 '복병'과의 싸움에서 얻는 경험을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 그 과정을 통해 자신만의 노하우를 축적해 놓으면,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행동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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