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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버티기 Feb 27. 2024

봄을 맞는 진심

나는 겨울을 좋아한다. 항상 그랬던 것은 아니고, 군 생활을 할 때는 오히려 싫어하는 계절이었다. 겨울을 싫어했던 기원은 해군사관학교 입교 훈련을 받을 때 '빤스 파티'이다. '빤스 파티'는 말 그대로 빤스만 입히고 두 팔, 두 다리 벌린 자세로 냉수 세례를 받도록 하는 것이다. 영하의 기온에 찬바람이 불면, 이한치한을 명목으로 주로 바닷가 연병장이나 옥상에서 진행되었다. 강원도 출신이라 추위에 익숙했지만, 얼음장 같은 물세례는 견디기 어려웠다. 임관 이후 함정에서 근무할 때, 눈발 날리고 파도치는 바다를 항해하는 것도 고역이었다. 특히 잠수함 함교는 노천에 있어 파도에 부서지는 차디찬 바닷물을 온몸으로 받아내야 한다. 심할 때면 눈썹과 머리카락에 고드름이 달리기도 한다. 그래서 겨울은 좋아하는 감정보다는 잘 견디고 참아내야 하는 계절로만 인식되었다.


해군에 가기 전, 학창 시절은 강원도에서 보냈다. 중 2 때까지는 험준한 태백산 준령 속을 전전했다. 한 겨울 문고리가 손에 쩍쩍 달라붙고, 밤새 내린 눈으로 싸리문을 열기 어려웠다. 그래도 겨울이 즐거웠다. 눈썰매와 스케이트 타기에 푹 빠져 지냈으니까. 그중 야트막한 경사지에서 비료포대를 타고 내려오는 앉은뱅이 스키는 별미 중의 별미였다. 겨우내 눈은 녹지 않았고, 어디를 가나 물은 얼어있었다. 양말은 물론 바지까지 젖은 추위는 페인트 통의 장작불로 날려버렸다. 겨울에 호감을 가졌던 다른 이유는 차가운 기운이 주는 신선 함이었다. 등굣길 나설 때 목덜미를 훑으며 올라오는 새파란 추위가 좋았다. 학교에 도착하면 추위를 떼어내주는 매캐한 연기 속의 난로가 있었다. 그 난로 위에 육삼 빌딩 같이 쌓아놓은 도시락이 덥혀지며 풍기는 냄새는 푸근했다. 이런 풍경들로 인해, 역설적이게도 겨울은 정감 있는 따스함이 느껴졌다.


군 생활을 하면서 멀어졌던 겨울에 대한 호감은, 퇴직을 하고 난 후 다시 돌아왔다. 역시 아쌀한 맛은 겨울이지. 생각만 해도 텁텁한 여름을 싫어해서 반대급부적으로 겨울에 호감이 갔을 수도 있고, 봄이나 가을은 어딘지 모르게 어중간해서 썩 끌리지 않았다. 하지만 이즈음 겨울이 나에게 주는 호감은 이런 피상적 감정보다는 더 속 깊은 감정이 들어 있다. 퇴직을 한 후, 머릿속은 온통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생각에 생각을 거듭한 끝에, 결국 최대한 늦게까지 현역으로 남아있는 것으로 정리했다. 그리고 도전을 시작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그 과정에서 겨울을 세 번 맞이하고 보냈다. 첫 번째 겨울은 동계 합숙훈련하듯 알차게 보냈고, 그 결과로 늦게까지 현역으로 남아있을 수 있는 자격증을 얻었다. 이렇듯 겨울은 추위라는 치명적 핸디캡을 무기로 유희의 유혹을 떨쳐낼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 미래를 만들 알토란 같은 시간을 제공해 주었다. 이런 믿음직한 겨울을 어찌 좋아하지 않겠는가.

    

다음에 맞았던 두 번의 겨울은 애증이었다. 지금의 일자리를 택하고 맞았던 첫겨울은 마음이 급했다. 모든 게 새롭고 무지 투성이의 일들을 알아가야 하는 부담감으로 보냈다. 그래도 약간은 거들먹거릴 수 있는 여유를 찾았으니 나름대로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고 볼 수 있다. 문제는 이번에 맞았던 겨울이다. 무언가 새로운 동력을 찾아내야 한다는 생각만 있었지, 행동이 따라가지 않았던 못마땅한 시간이었다. 일에 대한 자신도 붙었고 시간 운용에 대한 노하우가 쌓였는데도 말이다. 계획하고 기대한 만큼 시간을 알차게 가꾸지 못했다. 그냥 루틴 한 일상에 편하게 안주하였던 초라함이 전부였다. 이래서는 겨울을 좋아한다고, 또 인생을 알차게 만들 수 있는 많은 시혜를 받았다고 감사해 할 염치가 없어졌다. 손에 든 꽃다발 하나 없이, 봄을 맞는 것이 쑥스러워진다.


우수도 지나고, 봄 기운이 몰려오니 허망하다. 그 큰 겨울이 쪼그라든 채로 보잘 것 없이 버려지려 하고 있다. 아쉽고 또 아쉬움에 '시'라고 하면서 마음을 옮겨 보았다.   


봄을 맞는 진심


핏줄 같은 나목 위로

반가운 온기가

살포시 내려앉고

     

푸른 생명이

꾸역꾸역 몰려오고 있다

     

이제 마음 들떠

봄 마중 가겠지만

     

지난 시간 아쉬움이

몸에 무겁게 남아

     

또 동면의 꿈속에서도

잊지 못한 허무함으로

     

속 깊은 한숨 뿜으며

성의 없는 인사로

봄을 맞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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