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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케이 스토리텔링 Mar 05. 2022

42.195 킬로미터의 명상

2021년 호노룰루 마라톤

LA 마라톤, 아니 춘천 마라톤이었었나... 머릿속에선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포기했던 마라톤을 미리 세고 있었고 호노룰루 마라톤마저 포기해버린다면 미쳐버릴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모든 것이 그 자리에 정지돼버린 듯한 2년간의 코로나 생활은 그 기간만큼이나 사람들을 그립게 만들었다. 꼭 가족이 아니더라도 사람들과 만나 마라톤이 주는 흥분과 짜릿함을 나누며 달리고 싶었다. 난 어쩔 수 없는 호모 사피엔스 종족인가 보다. 

델타던 오미크론이던 관심 없어, 그래, 그냥 가는 거야, 그렇게 하와이로 떠났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녹빛으로 가득한 공원과 야자수 나무들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호텔로 가는 버스 차창밖으로 바라보는 하늘은 말 그대로 너무 맑고 파래 눈이 시렸다. 하늘 위엔 그림 같은 흰 구름이 두둥실 떠다니며 푸르다 못해 녹빛이 되어버린 와이키키 해변을 도도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호털에 도착해 짐을 풀기 무섭게 목까지 휘감고 있던 겨울 옷을 벗어던지고 반팔 반바지로 갈아입고 번잡한 시내로 나섰다. 반짝거리는 태양 아래 수영복 차림으로 서핑보드를 멘 채 시내를 활보하는 사람들과 마스크를 벗은 채 카이 커피 (Kai Coffee)를 들고 이야기하며 걷는 사람들, 해변 앞에 몰려 데모하는 사람들. 그리고 밤이 되자 반짝거리는 도시의 조명 아래 음악에 맞춰 신나게 춤을 추는 거리의 공연가들이 설레임을 돋구었다. 이곳에서는 모두가 지난 이 년간 웅크린 채 집에만 갇혀있었던 나와 달라 보였다. 우주 어딘가 특별한 행성에서 이주해온 듯 생기 넘치고 자유롭다. 어쨌든 나도 이젠 그 무리 중의 하나라는 생각에 가슴 한구석이 펑 뚫리면서 쾌쾌 냄새나던 움츠림이 쑥 빠져나갔다. 그렇게 폐 속으로 스며드는 마법 같은 하와이 12월 공기와 첫인사를 나눴다. 



도착한 이튿날엔 빕넘버를 받기 위해 하와이 컨벤션 센터를 찾았다. 달리기 용품을 파는 부스도 사람들도 많이 줄어들어 예전같지 않았다. 그래도 올해는 달릴 수 있어 좋다고 얼굴엔 모두들 웃음이 가득했다. 시시껄렁한 이야기마저 재미있어 처음 보는 사람들과 한참을 서서 이야기를 나누며 깔깔거렸다. 처음 만났지만 그들과 나눈 달리기 이야기는 오래된 친구처럼 서로를 끈끈하게 이어주었다. 마라톤이 주는 마법 같은 즐거움이다. 광고용 달리기 게이트 앞에 서서 자세를 가다듬고 사진을 찍고 또 찍어주며 서로에게 행운을 외치고 헤어졌다. 


다음날엔  마라톤 시작 지점인 알라모아나 공원 (Ala Moana Beach Park)과 도착 지점인 카피올라니 (Kapiolani Park) 공원을 돌아보았다. 저녁이 되자 와이키키 해변은 짙은 오렌지빛 석양으로 붉게 타올랐다. 곧이어 수평선 밑으로 가라앉는 태양 주위로 말로만 들었던 녹빛 광선 (Green Flash)이 반짝이며 황홀한 석양빛에 신비감을 더했다. 녹빛 광선을 본 사람들은 낯선 사이건만 또다시 신이 나서 서로 부둥켜안고 완주를 외쳤다. 


드디어 12월 12일 새벽 네시. 
와이키키 시내는 알라모아나 공원으로 걸어가는 러너들로 꽉 찼다. 역시 나와 같은 종족들이다. 사람들 속에 묻혀 습습한 새벽 공기를 마시며 공원으로 향했다. 도착한 공원엔 이미 러너들로 가득 찼고 곧이어 시작을 알리는 폭죽이 펑펑 터졌다. 어둠이 걷히지 않은 깜깜한 하늘은 빨강, 노랑, 보라 그리고 녹색의 불꽃으로 연실 타올랐다. 그 빛에 신이 난 러너들은 와우와우 탄성을 질렀다. 


하나, 둘, 셋,  달리자!
반짝이며 타오르는 불꽃들을 뒤로하고 그렇게 새벽 속을 달렸다. 얼마나 달렸을까. 캄캄한 어둠을 깨고 붉은 태양이 얼굴을 내밀었다. 잿빛으로 녹아내리던 검은 하늘은 온통 분홍빛으로 물들었다. 저 앞에선 어둠 속을 달리던 사람들이 중력의 리듬에 맞춰 발을 올렸다 내렸다 반복하며 떠오르는 태양 앞으로 한 발짝씩 달려갔다. 길 중앙선을 타고 백 살은 될성싶은 굵은 반얀 나무(Bayan tree)들이 쭉 늘어서 있다. 나무들은 살랑이는 바람에 푸른 가지를 흔들며 달리는 러너들에게 소리 없는 박수를 보냈다. 그래, 이 아름다운 모습을 오랫동안 기억해야지. 잠시 멈추어 서서 호흡을 가르고 셀폰에 그 모습을 담았다. 


그리고 또 한참… 

분홍빛으로 붉게 타던 하늘은 온데 간데 자취를 감췄고 옅은 회색으로 갈아입은 하늘은 슬며시 비를 뿌렸다. 살갗으로 떨어지는 차가운 빗방울이 어제먹은 파인애플 쥬스마냥 상큼하고 싱그럽다. 


그렇게 또 한참…

다시 흰구름 사이로 파란 하늘이 고개를 살며시 내밀었다. 저 멀리에선 수평선과 맞닿은 바다의 물결이 햇빛에 반짝였다. 그래, 저 모습도 오랫동안 기억 속에 저장하고 싶어. 또 한 장. 


얼마나 지났을까...


마음도 생각도, 평소 편하고 안락한 것만 찾던 몸뚱아리도 허공에 날리는 희미한 연기처럼 흔적 없이 사라져 버렸다. 가슴에 전해지는 쿵쾅거리는 발자국 소리만 온몸의 통증과 함께 파동을 일으키고 수혈하듯 세포 마디마디를 뚫고 들어왔다. 32킬로 미터를 알리는 깃발 아래에선 힘겹게 달리던 사람들이 절룩거리던 다리를 잠시 멈추고 사진을 찍는다.  


또 한참… 쿵쿵 쿵쿵
비틀거리며 영원 같은 7킬로미터를 또 달렸다. 


오른쪽엔 다이아몬드 산(Diamond Head)이 고요히 서서 달리는 사람들을 내려다보고 있다. 왼쪽으론 푸른 바다가 수평선과 맞닿아 있고 파도를 일렁이며 하얀 물거품을 연실 쏟아 냈다.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로 불어오는 바닷물 냄새에 취해 고꾸라질 것만 같았다. 그래 이모습도 지금 이 존재의 순간을 위해, 찰칵. 


그리곤 끝이 나지 않을 것 같은 나머지 3 킬로미터를 쿵쿵 쿵쿵… 쿵쿵 쿵쿵… 또, 쿵쿵 쿵쿵…


드디어 저 앞에 도착 지점이 보인다. 도착 개선문 앞으로 얼굴부터 들이밀자 기다렸다는 듯 사진사들이 연실 카메라 셔터를 누른다. 하, 이게 진짜 마지막, 이젠 정말로 그만 달리고 싶어. 푸른 잔디 위로 벌러덩 몸을 던지고 위를 올려다보니 푸른 하늘과 흰구름이 아득히 멀리 있다. 땀으로 짭쪼름해진 얼굴을 뚫고 쏟아져 내리는 호노룰루 햇빛이 너무 아름다워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카이 커피(Kai Coffee): 하와이에서 재배한 지역 커피로 하와이에서는 호텔 내에서도 스타벅스 커피점을 찾기 힘들고 카이 커피점이 대부분이다.

*녹색 광선(Green Flash): 태양이 수평선에 잠기면서 내려갈 때 생기는 빛의 반사로 몇 초간 녹색빛이 비치는 현상을 말하며 이 빛을 보게 되면 행운이 따른다는 전설이 있다.

*반얀 나무(Bayan tree): 인도가 원산지며 1873년 선교사의 소개로 하와이에 심게 되었다고 한다. 와이키키 시내 공원 곳곳마다 반얀 나무들이 장관을 이룬다.

*다이아 몬드  (Diamond Head): 화산 분화구로 만들어진 고도 762 feet 산으로 와이키키 해변과 오아우 섬 남쪽 해변 전망이 아름다워 하이킹 코스로 유명하다. 호노룰루 마라톤에 코스 8 마일과 24 마일 지점에서 이 산 밑을 지나가는데 고도는 100 feet를 약간 넘는 언덕 코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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