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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케이 스토리텔링 Nov 04. 2023

지옥을 통과할 땐 무조건 앞으로 가라

워싱톤디시 2023 해군(Marine Corp) 마라톤을 달리다

지옥을 통과할 땐 무조건 앞으로 가라. 영국 총리였던 윈스턴 처칠의 명언이라는 말도 있고 출처 미상이라고도 하는 이 말을 좋아한다. 개인적으로는 처칠의 말이라기보다는 출처미상이라는 말을 믿는 편인데 인종차별적이고 식민지 수탈에 혈안이 되 세계 모든 나라를 직접거리며 해하던 영국의 제국주의적 수탈을 지지했던 처칠이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이다. 한때 과거나 현재의 역사를 이끄는 세계 지도자들의 이야기에 꽤 열심인 적이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윤색되고 부풀려진 리더들 특히 서구 열강 지도자들의 비도덕적인 이중적 이념과 잣대, 뒷 행동들을 알게 되면서 이젠 과거든 현재든 위대한 사람들의 이야기에는 흥미를 잃었다. 그래서 나같이 평범하고 이름 없는 역사 속의 어떤 한 사람이 버거웠던 자신의 삶에 힘과 용기를 주기 위해 끄적였던 말을 처칠이 가져다 썼다고 믿기로 했다. 


지난주 일요일 10월 29일은 워싱턴디시 시내를 관통하고 서울의 한강과 같은 포토맥강을 가로지르는 48회 해군 마라톤 (Marine Corp marathon)이 있는 날이었다. 올해 3월 샌프란시스코에서 자전거 사고를 당하는 바람에 LA마라톤을 포기해야만 했던 것에 한(?)이 맺혀 이 마라톤만은 꼭 달려야한다는 생각에 여름 내내 열심히 연습했고 드디어 완주했다. Marine Corp마라톤은 내가 사는 지역의 마라톤이다 보니 꽤 많이 달려 몇 번을 달렸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도 이번이 열 번째는 되는 것 같다. 그래도 달릴 때마다 새롭고 감동적이다. 일단은 포토맥 강변을 끼고 붉게 물든 가을 나무들이 몹시 아름답고 그렇게 달리기를 하면서 만나는 하늘과 나무와 새 그리고 싸늘한 공기와 연결될 수 있는 이 내적 자각이 참 감사하다. 꼭 마라톤을 위한 달리기가 아니더라도 달리기를 할 땐 주위의 자연과 온전히 연결되는 순간이 온다. 그 순간엔 큰 존재의 일부로서 내 내부엔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타고난 신성한 빛이 있음을 느낀다. 종교가 없는 나 같은 사람도 어떤 초월적인 우주적 존재와 영적으로 연결되는 듯한 그런 느낌을 받게 되는 것이다.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지질하고 시시한 갈등들을 딛고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회복할 수 있는 소중한 순간이기도 하다.  


올해는 예상외로 달리기 후반엔 거의 팔십도(화씨)까지 육박하는 높은 기온과 습한 날씨, 거기다 생각을 잘못해 긴팔 바람막이 자켓을 입고 달리는 바람에 무척 고생을 했다. 초반 6마일에 벌써 땀을 많이 흘려 체력이 거의 소진되었고 13마일을 달렸을 땐 완주할 수 없을 것 같아 암담했다. 거기다 대소변까지 마려 몹시 괴로웠다. 그래도 가끔씩 포토맥에서 불어오는 시원하고 정겨운 강바람과 중간중간 러너들을 위한 해군군악대와 아마추어 뮤지션들, 워싱턴디시 시민들의 열렬한 응원에 힘을 낼 수 있었다. 어깨 가득 무거운 군장을 메고 씩씩하게 같이 달려주는 해군 병사들도 큰 힘이 되었다. 해군에서 주체하는 마라톤답게 Marine Corp마라톤에서는 포토맥 강가를 둘러싼 0.5 마일 정도의 달리기 코스에 베트남 혹은 한국이나 이라크 전쟁등에서 전사한 해군들의 사진을 일렬로 세워 놓는다. 매번 나라를 위해 젊은 나이에 목숨을 잃은 병사들의 모습이 가슴 한구석을 찌릿하게 후빈다. 그렇게 19마일을 찍고 20마일 지점에 이르렀을 땐 풀마라톤을 뛸 때마다 어김없이 되뇌는 마법의 그 말, 살아가면서 생의 고비고비마다 필연적으로 맞닥뜨리게 되는 삶의 그 20마일 지점에서도 늘 기억나는 말이다.   


지옥을 통과할 땐 무조건 앞으로 가라!


마지막 26마일을 찍고 Marine Corp 마라톤에서 마의 0.2마일 코스라 불리는 언덕을 올라와 결승점에 도달하자 해군병사가 거수경례를 하며 완주 메달을 걸어준다. 쓰러질 듯 혼미한 정신으로 Mission accomplished! 을 외치고 하늘을 보자 커다란 새 한 마리가 푸른 하늘 위를 도도히 유영하고 있다. 
 

오늘도 지옥 같았던 고통의 정점 20마일을 무사히 통과하고 끝까지 달릴 수 있어서 행복하고 감사하다. 







28일 토요일 National Harbor의 Gaylord 컨벤션 센터에 가서 bib number를 픽업하고
Gaylord 컨벤션 센터 내부
Bib number를 픽업해 집으로 돌아오는 길, 포토맥 강 옆 Fort Hunt Park 의 늦은 10월의 풍경. 잔차 바퀴밑에서 사각거리며 날리는 낙엽이 한없이 낭만적이다.  
드뎌 29일 아침 7시 메트로를 타고 펜타곤 근처 스타트 라인으로 갔더니 포토맥강위로 해가 뜨기 시작한다
시작부터 달리는 내내 이렇게 네이비실 헬리콥터가 상공을 떠다니며 러너들을 지켜보고 있다
Marine Corp 특유의 빨강색 스타트 게이트
이름 모를, 아마도 네이비 전역 병사일지도 모르는 아마추어 뮤지션들의 노래와 연주에 힘을 얻고
다시 네이비 군악대가 힘을 돋우어 주고
워터 포인트마다 들려 게토레이와 물을 벌컥벌컥 마시고
다시 힘을 내 달렸다
포토멕 강가의 스러져가는 가을나무 밑엔 어느새 낙엽이 수북이 쌓였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해군 병사들이 매번 가슴을 찡하게 울린다
국기를 휘날리며 보내는 응원에 다시 한번 힘을 얻고
우뚝 선 워싱턴 기념탑을 바라보며 
국회 의사당을 지나
다시 사각거리는 낙엽을 밟으며 포토맥 공원을 달렸다.  
힘이 다 빠져 더 이상 못 달릴 것 같아 괴로웠는데 뮤지션들의 신나는 북소리 연주에 다시 힘을 얻었다
지옥의 시작 20마일 지점에 서서 잠시 숨을 고르고
드뎌 목에 완주 메달을 걸었다


맨 밑바닥에 0.001 남은 힘을 마지막으로 짜내서 절룩거리는 다리를 옮기고 Rosslyn 역에서 메트로를 탔다. 집에 와서 영원의 잠을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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