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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케이 스토리텔링 May 21. 2024

몸이 하나씩 고장 나도 나이 먹는 게 나쁘지만은 않다

5월 찔레꽃 향기를 맡으며 프리드릭스버그 해군 하프 마라톤을 달리다

요즘은 해가 길어져 오후 여덟 시가 돼도 환하다. 곧 여름이 올 거고 10월까지는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달리기나 자전거를 탈 수 있으니 가끔씩 무더운 더위가 싫을 때도 있지만 길어진 낮시간으로 야외 활동을 더 많이 할 수 있는 이 계절이 좋다. 여느 때처럼 지난주도 퇴근하곤 동네 앞산에 가서 산악자전거를 타고 왔다. 온통 녹색으로 물든 트레일은 찔레꽃향기가 가득했고 명랑한 새들의 노랫소리로 마음속에 쌓였던 크고 작은 일상의 먼지들이 깔끔하게 씻겨내리는 듯한 느낌. 거기까진 좋았다. 그런데 이번엔 자전거를 타고나서 왼쪽 손목과 엄지손가락이 유난히 아픈 거였다. 처음엔 오늘 좀 힘든 코스를 타다 보니 나도 모르게 핸들에 힘을 많이 주어서 그런가 보다 했다. 몇 개월 전부터 증상이 있었지만 냉찜질을 하고 나면 곧 괜찮아지곤 해서 이번에도 냉찜질을 했다. 그런데 찜질을 해도 통증은 가시지 않고 가벼운 물컵조차 들 수 없을 정도로 아팠다. 더 속상한 건 컨트롤러를 조정하질 못해 요즘 몰입하고 있는 사무라이 닌자 게임 (Nioh2)을 플레이할 수가 없다는 거였다. 할 수 없이 늘 다니던 정형외과에 갔다. 엑스레이를 찍고 이런저런 검사를 하고 나온 진단결과는 퇴행성 관절염과 함께 손목건초염이 왔단다. 그리곤 일상생활이 불편할 정도도 통증이 심하니 일단 Cortisone Injection을 맞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했다. 소위 옛날 어머니가 퇴행성 관절염으로 고생하실 때 일 년에 한두 번은 맞으셨던 그 뼈주사를 맞은 것이다. 처음엔 퇴행성이라는 말과 뼈주사(이건 내 표현 ^^)를 맞아야 한다는 말에 약간 황당해져서 ‘노인성 건초염이라뇨. 저 60 되려면 좀 더 있어야 되는데요. 왜 생기는 건데요’ 하면서 죄 없는 의사에게 따지듯 물었다. 내 말에 연민인지 동정인지 모를 미소를 짓는 젊은 의사는 손을 많이 쓰는 일이나 운동을 하는 사람에게는 종종 젊은(?) 나이에도 발생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면서 손목이나 손가락 사용을 줄이면 이젠 낫는다가 아니라 괜찮아질 수 도 있다며 ‘젊은 나이’에 약간 힘을 줘서 말했다. 그런 의사의 위안 아닌 위안에 무안해져 나도 씩 웃고 말았다. 나름 오랜 시간을 자전거와 달리기로 단련된 몸이라 나이는 들었어도 퇴행성 몸의 증상은 나와는 상관없을 거라는 좀 오만했던 자부심에 금이 가는 순간이었다. 순간 마음밑바닥에서 은근히 올라오는 나이 들어감에 대한 서글픈 감정 같은 거. 그러면서도 이젠 살아갈 날들보단 살아온 날들이 더 많이 쌓였으니 하나씩 찾아오는 이 몸의 고장을 어쩔 수 없이 수긍하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자각이 오기도 했다. 


생각해 보면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짧다는 것은 남아 있는 시간에 대한 가치를 제대로 인식하게 해 준다. 즐거웠던 그렇지 않았던 지나간 시간의 기억을 되새겨보고 지금 이 순간에 온전히 머물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이다. 불행했던 기억보다는 행복했던 순간들에 무게를 두고 과거의 경험이 말해주는 교훈에 힘 있어 더 이상은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에 시달릴 필요가 없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지난 세월 삶이 주었던 그 혼란과 고단함은 내면의 단단함으로 이어져 더 이상은 요란하고 비틀린 세상의 소음과 시선에 휘둘리지 않는다. 육신은 비롯 쇠퇴해 하나씩 고장을 일으키나 그 대신 깨지지 않는 내면의 안정을 얻었다. 젊음도 늙음도 행복과 불행처럼 단지 자연스러운 삶의 한 과정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니 나이 드는 게 그렇게 싫지만은 않다. 2024년 5월 19일 오늘. 젊음에서 오는 육신의 에너지가 아니라 세월이 준 내면의 든든한 힘으로 창공 가득한 찔레꽃 내음을 맡으며 워싱톤 디시 프리드릭스버그 해군 하프마라톤을 달렸다. 오늘도 달릴 수 있어 감사하다.


 



잔차를 타며 달리기를 하며 2024년 5월의 기록


동네 공원에 핀 월계수 꽃 (Mountain laurel)





Marine Corp half marathon at Fredericksburg 19 May,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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