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코로나 걸린 거 아니야?"
아프거나 아팠을 얼굴들이 떠올랐다*
나는 까맣게 모르는 새에 백내장 수술을 받은 엄마, 상상도 안될 만큼 고된 병을 오랫동안 앓다가 그대로 안고 가신 할머니, 불편한 다리에 또 한 번 철심을 눌러 박은 아빠. 팔뚝에 피를 뚝뚝 흘리는 채로 병원에 입원한 그 애까지. 아픈 고통은 주변에 너무 흔하게 볼 수 있어서, 그 무게가 가볍다고 자주 착각하게 된다.
“나 코로나 걸린 거 아니야?”
같이 사는 그 애는 하루에 두 번쯤 나에게 물었다. 평소에도 몸을 챙기는 그 애의 말에 나는 허투루 들으며 슈퍼만 겨우 가는데 코로나를 대체 어디서 걸릴 수 있느냐고 대답했다. 말을 내뱉고 나서야 그 애는 나와 달리 슈퍼 말고도 그 애는 병원이며 약국이며 자주 다녔던 것을 기억해냈다.
눈에는 보이지도 않는 그 작은 바이러스가 대체 뭐라고 우리 삶이 이토록 달라진 걸까. 꽃놀이며 축제며, 봄 휴가까지 지금 누릴 행복의 몫을 미뤄두게 한 걸까. 부끄럽게도 나는 자연환경에 관심이 많은 편이 아니었다. 플라스틱 용기는 남들 쓰는 만큼 쓰고, 그나마 잘하고 있는 짓이라면 쓰레기 버리지 않는 정도의 평범한 일들이다. 그런데 미세먼지가 사라지고, 파랗게 변한, 아니 변한 것이 아니라 원래대로 돌아온 지구 곳곳의 하늘을 보면서 마음가짐이 조금 달라졌다.
게다가 정말로 신이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미루고 미뤘지만 이제는 진짜 자정작용을 해야 하는 때가 왔기 때문에 그 망할 바이러스를 퍼뜨린 거 아닐까? 이쯤 되면 우주 생명체의 절반을 없애야 한다는 타노스의 철학도 이해가 가기 시작한다. 누군가가 타노스의 마음으로 손가락을 튕겨 바이러스를 널리 널리 퍼뜨리는 거다. 코로나는 이런 상상까지 하게 만든다.
나는 그 애에게 가끔 할머니가 되는 게 두렵다고 말한다. 할머니가 되면 아주 높은 확률로 병을 얻는다. 그건 자연이 이치이기도해서 저항할 방법이 마땅히 없는데, 그렇다고 곧장 순응하기에는 너무나 고통스러운 것이다. 감기몸살에만 걸려도 아프고 끔찍한데, 할머니가 되면 더 자주, 더 깊게, 더 오랫동안 아플 것이 분명했다.
문득 아서 프랭크의 문장*이 떠올랐다.
“질병이 없는 인생은 불완전할 뿐만 아니라 불가능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통 없는 인간은 완전해질 수 없다고. 할머니가 되어 자주 아프게 되는 일이나 행여 그전에 병에 걸리거나 하는 일도 그저 완전해지는 방법 중에 하나 아닐까. 혹시 지구도 완전함을 찾아가고 있는 거 아닐까 하고 상상하면서.
나는 또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통 없는 인생에서 완전해질 수 있는 방법이 있지 않을까. 모든 걸 이해한다고 해도, 고통을 마주하는 일도, 고통을 마주한 사람을 지켜보는 일도 너무 어려우니까 말이다.
*임경선, <다가오는 말들>의 구절을 인용해서 씀
*아서 프랭크 <아픈 몸을 살다>에서 발췌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