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 욕하며 혼자 즐기는 한상차림 : 훈제오리를 곁들인 월남쌈
훈제오리를 먹기로 했다. 지난번에 배워 만든 땅콩소스와 쌈무도 챙기고, 냉장고에 먹다남은 닭가슴살도 따뜻하게 구웠다. 사놓은 줄 깜빡했던 새싹채소도 꺼내고 한국산 파프리카도 사왔다. 빨강과 노랑. 늘 두개 150엔(약 1,500원)이다. 뭐 얼마나 먹을까 싶어서 한개 들이 90엔짜리를 사온적도 몇번 있지만, 역시 파프리카라면 여러색을 두고 먹는 편이 좋다. 하나에 750원 꼴로 가격이 저렴하기도 하지만, 가격보다는 맛도 미묘하게 다르고, 상차림도 화려해져서 좋다. 영양소도 색깔마다 다르다는 걸 익히 들어왔다. 그래서 얼마전부터는 꼭 두개씩 산다. 역시 두개는 양이 많지만, 색깔별로 반씩만 먹고, 남은건 냉장고에 두면된다. 며칠전에 사온 스위트칠리소스도 빼놓을 수 없다. 오늘 메뉴는 훈제오리를 곁들인 월남쌈이다.
쌀밥이 필요없는 식사메뉴를 종종 즐긴다. (밥솥에 흰 쌀밥이 한가득이지만.) 밥을 먹으면 자주 식곤증에 시달려서 특히 아침에는 의식적으로 밥을 피한다. 무엇보다 월남쌈에 쌀밥은 안될소리다. 라이스페이퍼 몇장이면 충분하다. 밥 대신 큰 라이스페이퍼를 몇장을 꺼내 사등분했다. 그러고보니 혼자 먹는데도 접시가 꽤 필요한 음식이다. 라이스페이퍼, 고기류, 채소류, 앞접시 그리고 라이스페이퍼를 촉촉하게 적실 따뜻한 물을 담는 접시까지. 간단하게 먹으려고 최대한 모아 담은 것인데 더이상 줄이는 것은 무리인 것 같다.
오랜만에 한 상 차려내니, 맛있어보여 기분이 한껏 좋아졌다. 매일 먹는 끼니지만 오랜만인 이유는 며칠 전부터 설거지가 하기 싫어졌기 때문이다. 밥상 차리는 일도 지겨워졌다. '밥은 사먹자. 그럼 장볼필요도 없고("낮에 니가 좀 사다놔" 같은 말을 듣지 않아도 되고), 설거지 할 필요도 없고(겨우 일주일에 한두번 설거지 하는 그애에게 "왜 내가 설거지까지 해야되는지 모르겠어" 같은 말을 듣지 않아도 되고), 끼니마다 밥상을 꼼꼼히 닦을 필요도 없으니까!' 하고 다짐했었다. (뭘먹든 밥상 닦는 일은 여전하지만.)
외식하는 돈이 아까우니 매번 집에서 먹자는 그애에게 주말 밥당번를 맡겼다. 우리는 집앞 도시락가게와 라멘가게만 전전하게 됐다. 주말이니 나가서 밥을 먹던지 뭐라도 하자 말하면 영락없이 귀찮아 죽겠다는 표정에 나는 폭발하고 말았다. 평일에 일했으니 주말엔 좀 쉬고싶다나뭐라나. 욕을 좀 해보자. 출근하고 싶을때 출근하고 퇴근도 마음대로 하는 처지다. 집에오면 차려주는 밥먹고 방으로 들어가 네다섯시간 주식차트를 보거나 주식차트를 보는 유튜브를 보거나 개그맨들이 나오는 유튜브를 보며 흉내낸다. 그러면서 퇴근하고나면 피곤하다를 입에 붙이고 산다. 피곤할때만 피곤하다고 말하랬더니 입에 붙어 어쩔수 없단다. 그리고 주말이되면 침대에 들러붙어 하는 말이 가관이다.
“냅둬 나좀!”
나는 뭘 위해 사는건가. 가끔은, 아주 가끔은(아니 생각보다 자주 그럴때도 있다) 그 짧은 말 한마디가 나를 저 저 구석으로 내모는것 같은 때가 있다. 나도 나름대로 자주적인 여성으로 자라왔다고 믿었다. 자존감도 잘 가꾸고 보살펴 이만큼 키워왔다. 어디부터 잘못됐는지 모르겠다. 내가 처음 우울증을 앓았을때도 이자식 때문이었다. 그땐 왜 몰랐을까! 학생의 우울증은 학교를 그만두면 낫고, 기혼자의 우울증은 이혼하면 낫는다더니 정말 그런건가. 그애의 여동생이 “왜 오빠랑 결혼해요?”하고 물었을때 도망쳤어야 했나. 이제는 무엇이 진짜인지 헷갈려진다. 재밌는것도 맛있는것도 없다. 이 멍청이는 내가 뭔가 먹고 싶다고 할할때 이런 비난의 말을 한다.
“넌 어떻게 맨날 그렇게 먹고 싶은게 있냐?”
"그럼 아무것도 안먹고싶어하고 안하고 싶어하고 시체같은 사람이 좋아?”
하고 받아치지만 나는 안다. 그 말이 내게 상처주었다는 것을. 나는 가족, 친구, 애인 그 누구에게도 나는 비난의 말을 들은 적이 없었다. 아니 정정한다. 분명히 있었겠지만, 나는 서서히든 단칼에든 연을 끊어냈을 것이다. 비난을 퍼붓는 사람과 오랫동안 관계하는 건 견딜수가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건 내가 나 자신을 보듬는 방법중 하나였다. 그런데 서로 보듬자고, 사랑하자고 만나 살을 부비는 이 멍청이가 그런말을 서슴없이 내뱉는다. 가끔은 진심이 아닌걸 아니까 괜찮아 혹은 표현이 서투르니까 그런거겠지 하고 넘기곤했는데 나는 곧 모두 잘못됐다는걸 깨달는다. 아무리 멍청한 말도 뭉텅이로 모아 짓누르면 숨이 막힌다.
막히는 숨은 잠시 잊고, 따뜻한 물 안에 라이스페이퍼를 한장 넣어 적신다. 숨이 막혀도 밥은 먹어야 하니까. (죽고싶어도 떡볶이가 먹고 싶은것처럼) 쌈무를 한 장 올리고, 새싹채소를 조금 집어 둔다. 노란파프리카, 빨간 파프리카도 하나씩 올린다. 내용물이 흐르지 않게 라이스페이퍼를 잘 접어본다. 월남쌈은 몇번을 먹어도, 야무지게 싸먹는 방법을 모르겠다. 엄마는 야무지게 잘하던데. 어떻게든 쌈을 싼 다음, 다음 땅콩소스를 콕 찍는다. 한 통 사다두고 '몇번 안먹을거 같은데 괜히 사왔나'하고 고민했던 땅콩버터에 슬쩍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시아와세~’는 아니지만, 맛은 있구만. (일본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여자주인공이 맛있는 음식 앞에서 꼭 두손을 모으고 “시아와세~”를 외친다. 행복해라는 뜻이다.) 행복까진 아니어도 이렇게 글을 쓸 힘이 생겨 좋다. 손수만든 밥상의 힘일까. 파프리카를 사러 슈퍼에 다녀올때까지만 해도 그자식은 생각도 하기 싫었는데 말이다. 언제쯤 기뻐 죽겠는 표정으로 "시아와세!"를 외치며 식사할 수 있으려나. 조금 더 욕심을 내 소리내서 웃고싶다. 다시 라이스페이퍼를 곱게 접어본다.
<오늘의 밥상 : 훈제오리>
훈제오리 : 200g
파프리카 : 1개 분량
곁들임채소 (새싹채소, 오이, 당근, 무순, 파인애플 등 취향에 따라)
라이스페이퍼 : 먹을만큼
스위트칠리소스 : 시판용 아무거나
땅콩소스 : 땅콩잼, 올리고당, 간장, 레몬즙
(*훈제오리는 쌈무와 부추무침을 곁들여도 잘 어울린다. 그건 다음에..)
만들기
0. 땅콩소스를 만든다 (땅콩잼2 : 올리고당1 : 간장1 : 레몬즙 약간)
1. 훈제오리를 찜기에 찐다 (전자렌지에 데우거나 오븐에 굽기도 가능하다)
2. 곁들일 채소를 씻어서 먹기 좋은 크기로 자른다. (파프리카, 오이, 당근 등은 무순의 길이정도로 얇고 길쭉하게 썰어내면 알맞다)
3. 따뜻해진 훈제오리를 먹기좋은 크기로 자른다
서빙하기
1. 채소류와 훈제오리를 보기좋게 담아낸다
2. 끓인 물을 크고 오목한 접시에 낸다
3. 소스를 소스접시에 담고, 앞접시도 같이 낸다
4. 라이스페이퍼를 따뜻한 물에 적시고, 앞접시 위에 둔 다음 취향껏 소스와 채소, 고기를 넣고 잘 접어 먹는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