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에트바스 May 29. 2021

사랑의 말들을 떼어먹으며 자란다

농담 반, 진담 반의 마음으로 그 애에게 말했다. 

"나 정신과에 가보고 싶어."


글은 권력이라 외치며 '은근히 남 욕하는 글'은 다신 쓰지 않겠다고 다짐한 적이 있다. 내 글을 읽는 독자는 아주 소수이고, 덕분에 이 세상에 티끌만큼도 영향력이 없다는 게 내 생각이지만, 혹시라도 읽어서 상처 받을지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그리고 쓰는 동안에도, 쓰고 난 후에도 영영 괴로울 나를 위해서였다. 하지만.


자꾸 욕하고 싶어 진다. 쌍자음이 들어가는 욕이 아니라, 험담이 하고 싶어 진다는 뜻이다. 부부라는 게 원래 이런 건가! 하고 화가 나는 날에는 딱히 말할 사람이 없어서 나만 혼자 보는 노트에 적는다. 애석하게도 화만 더 뻗친다. 상황을 객관화해보자며, 내 마음이 어떤지 차분히 적어 나가다 보면 정말 화딱지가 난다. 뭐든 그 애가 잘못한 것 같아서다. 뒤늦게 사실은 온전히 그애 잘못만은 아니라는 걸 깨닫는다. 따지고 보면 그다지 화낼 일도 아니었다는 생각에 내 마음은 더 암흑천지가 된다.


학생의 우울증은 학교를 그만두면 개선되고, 회사원의 우울증은 회사를 그만두면 괜찮아진다는 말을 들었다. 정신의학과 전문의의 말이었다. 그땐 무심코 넘겼는데, 나중에서야 나는 그 말에 완전히 동의하게 되었다. 사람들이 겪는 우울감의 원인은 다수가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환경에서 비롯된다. 아무래도 기혼여성의 우울감은 남편으로부터 시작되는 게 확실하다.






신경정신과나 상담소를 다니는 사람들이 자주 목격한다. 정기적으로 건강검진하듯이 마음을 들여다보며 미리 정신건강을 챙기는 일이라 짐작해본다. 어느 날 갑자기 나락으로 떨어지는 기분을 맞닥뜨리기 전에 내 이야기를 들어줄 누군가를 찾는 것이다. 나도 그런 의미에서 한 번쯤은 정신과에 들러 내가 정상적인 사고를 하며 살고 있는 건지, 이따금씩 우울할 땐 어떻게 해야 하는지,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무기력감이 찾아오면 나는 뭘 하며 버텨나가야 하는지 묻고 싶어 진다.


즐겨보는 유튜브에서는 자주 명사들의 인터뷰 영상을 올려 준다. 한 날은 정신과 의사가 나와 이런 얘길 했다. 요즘 젊은 사람들에게는 멘토가 없는 것 같다고. 여기서 멘토라는 건 진심으로 귀 기울여주고 응원해주는 주변의 어른이라는 뜻이다. 무조건적인 응원까진 아니더라도, 무슨 말을 하건 내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들어주는 사람이 주변에 있다는 거, 정말 상상만 해도 힘이 날 것 같다. 멘토 같은 어른이 필요하다는 건 ‘요즘 젊은 사람들’에게만 해당하는 말은 아닐 것이다. 어린 시절의 나도, 지금의 나도, 앞으로의 나에게도 그런 사람은 필요하다고 생각하니까. 


과거의 나에게 그런 사람이 있었던가 하고 되짚어본다. 영화나 드라마에 등장하는, 열정적으로 지지하고, 특별한 대가없이 봉사해주는 '주인공 친구'의 존재는 내게 없었던 것 같다. 인생이란 애초에 혼자 왔다가 혼자 가는 것이라 믿었다.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세상에 하나도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존재인 것 같아 이따금씩 괴로워했다. 애초에 나를 온전히 알아주는 그런 사람일랑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따져보면 내 마음을 온전히 드러낸 적 없었다. 드러내지 않았으니 당연히 알아챌 사람이 있을 리도 없었다. 


내가 외롭거나 괴로울 때 듣고 싶은 말들을 무엇이었을까. 나는 대체 누가 어떤 말을 해주길 기대했던 걸까. 위로의 방법들에 대해 생각한다. 저마다 애쓰며 살지만, 개인이 느끼는 어려움에는 경중이 없다. 자신 아닌 누가 감히 그런 것을 판단할 수 있을까. 그래서 타인의 위로는 주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쉽지가 않다. 가끔은 여전히 기대한다. 타인을 온전히 헤아리는 일이 혹시 가능할지도 모른다고. 그래서 말하지 않아도 내 마음을 속속들이 알아주는 사람이 나타날지도 모른다고. 결론은 늘 같다. 그런 타인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돌이켜보면 나를 온전히 알아주는 사람은 없어도 힘을 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엄마가 그랬고, 고등학교 시절 담임선생님이 그랬다. 아이에게는 어른의 한마디가 평생토록 힘을 준다. 내게는 ‘우리 선화는 참 인내심이 있어’, ‘선화는 자기 할 일은 알아서 잘한다니까’ 같은 말들 이었다. 그건 내 말과 행동에 대한 칭찬이기도 했지만, 나를 지켜봐 주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건 아마 사랑이 아니었을까. 


사랑이 대체 뭐길래 그 많은 가수들이 온통 사랑타령인가 생각한 적이 있었다. 우리는 아껴주고, 특별하게 보아주는 존재들의 사랑 덕분에 이렇게 살아갈 수 있는 것 아닐까. 그 너머의 진실 무엇이었든 간에 나는 위급한 순간마다 그 사랑의 말들을 조금씩 떼어먹으며 더 나은 아이로 자랄 수 있었다.






크리스마스나 새해를 맞아 좋아하는 이들에게 카드를 보낸다는 사람들을 종종 만난다. 나도 따라 써볼까 하고 생각한다. 식상한 문장을 무기 삼아 쑥스러워 묻지 못했던 안부를 물어보련다. 너는 내게 소중한 사람이라는 걸 조금이나마 보여주고 싶어서다. 아마 나는 우체국에 그 카드를 맡기자마자 부끄러워 시간을 되돌리고 싶어질 것이다. 카드를 받고서 쑥스러워하거나, 예고 없이 불쑥 내민 내 마음을  보고 황당해할지도 모를 상대방을 생각하니 두려운 마음도 든다. 그래도 기어이 써 보겠다고 욕심을 내본다.

물론 빈번하게 지나친 기대와 실망을 반복하며, 나를 우울의 나락으로 떨어뜨리기도 하고, 아주 가끔은 위로가 되어주는, 어쩔 수 없이 이제는 특별한 존재가 되어버려 다른 도리가 없는 그 애에게도 써서 손수 전해줄 거다. 앞으로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자는 말을 덧붙여서.

매거진의 이전글 한봄의 풍경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