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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트바스 Jul 24. 2021

사랑의 증언



최유수는 사랑에 대해 어찌나 할 말이 많은지, 사랑을 진술하는 책을 몇 권이나 냈다. 대체 왜 그는 그토록 증언하고, 또 증언하는 걸까. 자주 읽고 쓰는 동안 나는 필연적으로 사랑을 말해야 했다. 사랑을 모름에 대해서도 쓰고, 유행가 속 사랑에 대해서도 쓰고, 다양한 사랑의 종류에 대해서도 썼다. 딱 하나 차마 쓰지 못하는 사랑이 있다면, 그건 지난 사랑에 대해서다. 거창한 것은 없어도 그 애가 볼까 염려되기 때문이다. 이럴 땐, 소설의 세계로 도망치는 수밖에 없다. 그 애의 마음도 내 마음도 타자인 채로, 전지적 작가의 시점으로, 신의 시선으로 써보는 것이다. 


그럼에도 언젠가 한 번은 지난 사랑에 대해 정리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정확히 '구남친들'을 주제로 한 독립출판물을 목격한 후 부터다. 나는 그 책의 표지와 글 몇 줄을 읽자마자 나도 그들에 대해 촤르륵 써보고 싶다는 생각에 두 눈이 번뜩였다. 단숨에 몇 장이고 써낼 수 있을지도 몰랐다. 나는 번뜩이는 눈으로 사랑과 애인에 대해 몇 번이나 글을 썼다. 정리는 딱 한 번이면 충분한데도 몇 번이나 글을 쓴 이유는 매번 완성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건 단숨에 써 내려갈 수 없는 일이었다. 역시 신의 눈이 필요한 걸까.








학창 시절에는 우정이 무엇인지 사랑이 무엇인지 한껏 헷갈렸다. 나는 아직 사랑을 만나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시절 내가 알던 사랑은 이성 간의 정이고, 동성 간의 정은 우정이라고 하는데, 왜 '사랑해'를 대체하는, 우정을 고백하는 말은 없는 걸까 하는 것들을 궁금해하곤 했다. 그러는 동안 나는 그 흔한 짝사랑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10대 후반이 되었을 무렵에는 혹시 내가 사랑하지 못하는 병에 걸린 건 아닐까 하고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내 친구 H가 교회 오빠를 열심히 따라다닐 때도, Y가 잘생긴 동네 오빠에게 손 편지를 전할 때도 나는 사랑을 몰랐다. 사랑하면 죽는다거나, 키스하면 죽는다거나 하는 병이 있다던데, 나는 혹시 그런 애가 아닐까 하고 자주 의심했다. 열아홉이 되자 의심은 깊은 걱정으로 변해갔다. 그건 너무 우습고 어쩐지 창피해서 오래도록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이 되었다.


놀랍게도 어른이 된 나는 키스해도 죽지 않는 평범한 인간으로 자랐다. 애인을 만나고 사랑한다 고백도 했다. 그러나 내가 진정 사랑을 느꼈을 때는 짝사랑, 세 번째 애인 그런 애들과 마주했을 때가 아니라, 내가 ‘엄마’ 비슷한 인간이 되면서 였다. 작고 약한 존재가 곁에 있을 때 나는 사랑을 배웠다. 나는 처음으로 보호자 행세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작고 흰 강아지는 나에게 이전과 다른 사랑을 느낄 수 있게 해 주었다. 각각의 인간이 가지는 사랑의 총량이 있다면, 그런 존재들은 그 총량을 한정 없이 부풀어 오르게 한다. 12월 24일에 온 그 애는 산타로 불렸다. 나는 산타의 엄마가 되었다. 


내 친구들은 이모나 삼촌이 되었고, 내 애인은 산타의 아빠가 되었다. 나는 알아듣지도 못하는 그 애에게 자주 말을 걸곤 했다. 산타와의 시간들이 너무 좋아서 자주 그 애가 나오는 꿈을 꾸었다. 이갈이를 하느라 나무 식탁의 다리를 다 부숴놓아도, 그 애의 흰 털이 수북하게 빠져도 좋았다. 그 애가 태어난 지 100일쯤 된 어느 날, 축 쳐져있던 귀가 쫑긋 서 완벽한 삼각형 귀가 되었는데, 그 모습이 너무 귀엽고 기특해서 날마다 쓰다듬어 주었다. 그 애는 이전보다 나를 따뜻한 사람으로 만들어 준 게 확실했다. 그 애를 향한 내 마음이 사랑이 아니라면, 다른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사랑 같은 철학적인 질문에 답하려 애쓰다 보면 이런 것들을 정의하는 것이 다 무슨 소용인가 하는 생각이 불쑥 다가온다. 이건 다 언제가 책에서 본 문장 때문이다. 저자는 ‘ㅇㅇ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더는 매달리지 않으려 한다고 말하며, 그런 질문을 던지면 사람들은 주제의 본질에 다가갈 수 있다고 여기지만, ‘어떻게 해야 더 인간답게 살 수 있을까’라는 진짜 물음과는 큰 상관이 없지 않느냐고 덧붙인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다 보면 어쩌면 세상의 수많은 질문들이 학자의 영역은 아닐까. 그럼에도 종종 이것저것 정의하고 싶어 진다. 학자는 아니지만 가끔 그들의 흉내를 내면서 마음속, 머릿속에 아직 명확히 보이지 않는 것들을 찾아가고 싶어 진다. 사랑은 어디에서 어디로 향하는지, 그 무수한 모양들 중에 진실은 무엇인지, 진실이라고 믿어 마땅한 것은 무엇인지. 내게도 가득 있는지, 무뚝뚝한 그 애도 양속 가득 쥐고 있는지. 사랑은 정말이지 무엇인지 말이다. 


이렇게 결론지어 보기로 한다. 사랑은 무수한 모양과 마음들이 뒤섞여 또다시 무수한 형태로 다가온다고. 그리하여 사랑은 어디에나 있고 누구에게나 필요하다고. 혹시 누군가 필요하다면 지금 내 것이라도 괜찮다면, 잔뜩 나누어 줄 준비가 나는 되어있다고. 사랑은 어쩌면 진짜 물음에 대한 답이라고.
























* 언젠가 읽은 책 : 장강명의 <책 한번 써봅시다>

* 최유수 : <사랑의 몽타주>, <사랑의 목격>, <영원에 무늬가 있다면>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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