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오카자키
바깥은 아찔할 만큼 뜨거운 여름이다. 환기라도 시킬까 싶은 마음에 아침마다 창을 열어두지만, 청소기만 빨리 돌리고 냉큼 닫아두게 된다. 이때다 싶어 뜨거운 바람이 집안 곳곳을 휘젓기 때문이다. 한숨 돌려 책상에 앉아 뭐라고 할라치면 어느새 오후가 된다. 서쪽으로 창이 난 이 방은 오후가 되면 해가 짙게 드는데, 종일 에어컨을 켜 두어도 더운 기운만 겨우 가실뿐이다.
한 며칠간은 외출할까 말까를 두고 괜히 휴대폰을 열어 날씨를 확인했다. 비가 오면 비가 와서, 해가 나면 해가 나서 나가기를 꺼렸다. 그간 외출 준비를 하며 옷장을 뒤적거릴 때마다 시리를 찾았다. "시리야, 오늘 날씨 어때?" 하고 외치면 꽤 정확한 날씨정보를 알려준다. 시리가 다른 말은 잘 못 알아들어도 날씨 하나는 기가 막히게 알려준다. 0도씨 이하면 크고 두꺼운 점퍼를 꺼내고, 20도씨가 넘으면 컨디션에 따라 얇은 카디건 하나 정도만 챙긴다. 30도가 넘어가는 여름이 오자 나는 더이상 시리를 찾지 않게 되었는데 어차피 덥고, 기온이 한정 없이 올라간다 해도 벗는 일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었다.
교토는 대구와 같은 분지로 알려져있다. 여름은 정말 무덥다고 익히 들어왔는데, 정말로 그 계절이 돌아왔다. 전기장판과 코타츠로 겨우 버티던, 그 겨울에는 영영 오지 않을 것만 같은 계절이 어김없이 찾아온 것이다. 시리에게 날씨는 묻지 않은 채 바깥으로 나섰다. 뜨거운 공기가 온몸을 감싸자 그제야 휴대폰으로 날씨를 확인한다. 36도. 얼마 전 열 돔에 갇힌 캐나다가 생각났다. 열대야 같은 말도 모자라 40도가 넘는 공기 속에 갇힌 사람들. 그들에겐 조금 미안하지만 내가 그 안에 있는 건 정말 상상도 하기 싫다고 생각했다.
요 며칠 사이 유튜브에서 SF영화를 리뷰하는 영상을 자주 봤다. 한두 개 보고 흥미로워한 것이 전부인데 유튜브는 고도화된 알고리즘 기술을 활용해 온갖 비슷한 영화들을 소개해 주었다. 모두 황폐해진 지구를 떠나는 인류에 관한 이야기다. 어떤 인류는 타임머신을 타고 공룡이 사는 시대에서 새로 시작한다. 어떤 인류는 인간의 수명으로 닿을 수 없는 행성에 터전을 잡기 위해 오랫동안 잠들기를 택한다. 또 어떤 인류들은 지하벙커에 살며 지구를 침략하는 외계인(어쩌면 외계에서 온 기계일지도 모르는)과 싸운다. 어떤 인류는 40여 년간 우주선에서 살 수 있는지 실험하기 위해 가짜 우주선을 만들고 몇몇 인간들을 데리고 실험한다. 몇몇 이야기는 벌써 90년대에 쓰였는데, 내가 모르는 새에 이렇게나 많이 지구의 황폐와 우주에 관한 이야기들이 만들어진 것을 보면, 더 이상 먼 이야기는 아닌 것만 같다.
그런 이야기들을 보며 어떻게 저렇게 살 수 있지! 저런 상태로 어떻게 평생을 살지! 하고 탄식하다 보면, 마스크를 꾹꾹 눌러쓴 나와 주변을 살피게 된다. 전엔 상상하지 못했던, 말도 안 되는 상태로 우리는 벌써 이렇게 살고 있었다. 어쩌면 가까운 때에 우리는 상대적으로 연약해진 몸을 보호하기 위해 헬멧이나 우주복 같은 것을 입고 평생 동안 살아가야 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어떻게'나 '저렇게'는 더 이상 이상한 일이 아닌 것처럼 여겨졌다.
숨이 턱턱 막히는 뜨거운 날은 집 앞에 버스정류장이 있다는 게 정말 행운처럼 여겨진다. 땀이 흐르기 전에 재빨리 버스에 올라탈 수 있다. 버스를 타고 도착한 곳은 오카자키 공원 입구. 그동안 교토에 살며 가장 많이 들른 장소가 바로 이곳 오카자키 공원 일대가 아닐까 하고 짐작해본다. 자주 들르던 스타벅스가 있어서인데, 츠타야 서점과 함께 있어 책은 물론이고 시시때때로 구성이 바뀌는 생활용품이나 문구류도 구경할 수 있고, 스타벅스 답게 여느 카페들과는 다르게 한껏 노트북을 펼쳐두어도 눈치 볼 일이 없다.
2층으로 가면 공부할 수 있도록 적당한 크기의 테이블과 의자가 마련되어 있는데, 도서관만큼이나 쾌적하다. 스타벅스에서는 자전거를 빌려주기도 하고, 휴일이면 공원에 놀러 온 아이들 웃음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즐겁다. 가끔은 플리마켓이나 공연이 열리기도 한다. 교토를 소개하는 가이드북에서 자주 추천되는 곳은 아니지만(아무래도 '교토의 전통'과는 거리가 먼 분위기라서 일지도 모르겠다), 헤이안 신궁과 주변으로 수로변도 운치 있다.
* 제목은 김애란의 소설 <바깥은 여름>을 인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