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여름, 강릉에서 한달살이 하는 친구에게 놀러 가기로 했다. 이번 여행은 좀 특별했으면 하는 마음에 필름 사진을 찍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회용 필름 카메라를 인터넷으로 구하는 것은 쉽지만, 여행 준비물을 챙기는 시간은 여간해선 넉넉하게 주어지지 않는다. 예전만큼 일회용 카메라를 파는 가게가 눈에 잘 띄지 않았는데, 수소문 끝에 강릉 시내의 코닥(kodak) 매장에서 겨우 구할 수 있었다.
그렇게 2박 3일을 여행하는 동안 부지런히 셔터를 눌렀다. 놀랍게도 필름은 꽤 많이 남아있었다. 그렇게 사진을 현상하지 못한 채 그대로 일본에 오게 되어 한참이나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다시 한번 필름 사진으로의 욕구가 생기기 시작했다. 우연히 미술관 옆 기념품점에서 예쁜 카메라를 발견했는데, 필름을 갈아 끼울 수 있는 다회용 카메라였다. 무턱대고 필름 카메라를 구입하긴 좀 곤란하던 차였는데, 이거라면 왕초보인 나에게 잘 어울리는 카메라가 아닐까.
그렇게 고른 카메라의 이름은 '로모그래피 심플 유즈 컬러 네거티브 400'. 굳이 플래시 컬러가 있는 카메라를 선택했는데, 어쩐 일인지 플래시가 고장 나서 한 번도 사용하지 못했다. 제조사에 문의하니, 영수증과 영상을 보내달라고 했다. 영수증은 이미 버린 뒤였고, 현금으로 샀으니 구매 증거로 내밀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냥 써야지 뭐. 하고 생각하면서 사진을 찍는 몇 개월간 몇 번이나 플래시 버튼을 눌러 시도했으나 역시 고장. 반전은 없구나.
드디어 필름 한골을 다 찍고 현상을 맡겨둔 것이 지난주였다. 36장의 사진을 찍는 동안 5개월이 훌쩍 지나 있었다. 그동안 '망한 필름 사진'의 사례를 종종 보아왔기 때문에, 겁쟁이인 나는 사진으로 인화하는 것 대신 파일로 받는 스캔을 선택했다. 사진 가게의 직원은 두세 장은 더 찍을 수 있다고 친절히 알려주었지만,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다이조부(괜찮아요)"를 외쳤다. 엉망진창인 일본어와 손짓 발짓, 그리고 휴대폰 번역기에 기대어 벌써 많은 대화를 했는데, 두세장 찍고 다시 이곳에 찾아와 이 많을 말들을 다시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현상과 스캔 비용은 1230엔. 막연히 하루면 되겠다고 생각한 빨리빨리의 민족은 일주일 후에 필름을 찾으러 오라는 말에 "정말 일주일이 걸려요?"하고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망한 필름 사진이란, 대부분 까맣게 나온 것들을 의미한다. 사람에 따라 초점이 맞지 않는다던지 하는 것들을 문제 삼는 사람들도 있지만, 필름 카메라 입문자인 나는 '전부 새까만 사진들만 나오면 어쩌지'하는 고민들만 가득했다. 이윽고 현상된 필름을 받아 들었다. 새 필름도 한롤 사기로 했다. 보라색(박스로 포장된) 필름을 골라 들었다. 직원이 대뜸 내 카메라를 보자고 하더니, 이 필름은 안된단다. 일본어의 굴레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어 어영부영 집어 든 필름은, 흔히 사용되지 않는 중형 필름이었다. 다시 같은 이름의 작은 사이즈의 필름을 집어 들고 계산하려는데 이번에는 다른 직원이 다가와 이것도 안된단다. 왜? 사람들은 잘도 쓰던데. 그냥 산다고 했더니 어두워서 안된다며 한사코 다른 필름을 권했다. 결국 계산대에 오른 필름은 PORTRA 400.
사진 가게 근처 스타벅스를 겸하는 츠타야 서점에 들렀다. 빨리 사진을 보고 싶어서였다. 웹하드에 올려진 사진을 다운로드하고 몇 번이나 둘러본다. 까맣게만 보이는 사진도 몇 장 있었지만, 이만하면 완전히 망한 것은 아니었다. 오늘 산 필름이 어떤 건지 검색하다가 뒤늦게 창피함이 밀려왔다. 내 카메라는 다회용이지만, 일회용 카메라와 다르지 않은 성능을 가졌다. 보통 사람들이 쓰는 필름 카메라의 조리개 값은 1.4~22 사이인데, 이 카메라의 조리개 값은 9. 나는 조리개 같은 건 생각 못하고 감도 낮은 필름을 사겠다고 떼를 쓴 것이다. 조리개 값과 ISO가 사진의 밝기를 조절한다는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일회용 카메라의 조리개 값이 있다고는 왜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까.
집에 돌아와 간단한 보정작업을 위해 사진을 불러왔다. 거기에는 수평이 맞지 않거나, 누가 주인공인지 모른다거나 하는 사진들이 있었다. 잘 찍었다고 불리는 사진은 아닐지언정 이 사진들이 그때의 내 시선이라고 생각하니, 수평을 맞추는 일보다 어쩌면 그때의 내가 더 잘 드러나는 건 있는 그대로가 아닐까. 말과 글은 마음을 담는다는데, 그런 면에서 보면 사진도 예외가 없나 보다. 말이나 글은 그 기술에 영향을 많이 받지만, 사진만큼은 그중에서 가장 왜곡의 적은 매개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술의 영향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뷰파인더를 보는 그때의 내 시선 그대로가 상으로 맺히기 때문이다.
필름 한 롤을 찍는 게 생각보다 오래 걸려서 새삼 놀라긴 했지만, 현상을 기다리며 지난 일상들이 필름에는 어떻게 남았을까 하는 기대가 뒤섞여 즐거웠다. 디지털카메라나 휴대폰을 대할 때와는 달리, 검지 손가락은 필름 카메라의 셔터를 누를 때 몇 배로 신중해졌다. 신중해진 만큼 적어도 카메라를 든 시간만큼은 일상을 보는 시선도 조금은 진중해졌다고 할까. 조금 더 자주 찍게 되면, 혹시 어느 날 거리를 걷다가 꼭 마음에 드는 중고 카메라가 나타난다면, 심플 유즈의 뒤를 잇는 새 카메라를 사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해본다. (물론, 중고로!)
"사진은 잘 나왔어?"
"응. 생각보다. 볼래?"
"오 괜찮네. 뭔가 감성적이고"
"필름도 한통 더 사 왔어"
"그럼 카메라도 하나 사는 거 어때?"
"음.. 한골 더 찍어보고 공부도 좀 더 해야 될 거 같아"
그 애의 시선에는 장난감처럼 생긴 플라스틱 카메라가 좀 자질구레해 보였나 보다. 공부가 필요하다고 말은 했지만 흔쾌히 사라 고하니 내심 반가웠다. 서류로 맺어진 2인 가족은 뭔가를 살 때(특히 생활필수품이 아닌 것) 필연적으로 상대의 허락을 받게 되어있기 때문이다. 누가 규정하진 않았어도 저절로 그렇게 된다. 음. 그러고 보니 만원이 훌쩍 넘는 필름을 플라스틱 카메라에 끼우는 건 좀 예의가 아니려나 (♪)
왕초보가 왕왕초보에게 알려주는 필름 사진 팁
1. 일회용 카메라 또는 다회용(토이 카메라)는 감도(ISO) 400 정도의 필름으로 찍어야 알맞다.
2. 조리개 값은 작을수록, 감도는 클수록 밝은 사진을 찍을 수 있다.
3. 카메라의 감도는 작을수록 필름의 입자가 고와서 선명한 사진을 찍을 수 있다.
4. 조리개 값이 크고, 고정되어있는 일회용/다회용/토이 카메라는 실내 촬영 시 대부분 까맣게 촬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