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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피 Feb 03. 2023

자존심이 준 선물

이혼하면 어때 #1

그럼 이혼해.


이런 니미랄. 짧은 카톡 문장이지만 가슴을 망치로 내리치는 느낌이었다. 올 것이 왔구나. 이어서 드는 여러 가지 잡념들.


'설마 했는데, 이런 말을 하다니...'

'금방 잘못했다고 빌 거면서 재보는 거겠지?!'

'이 정도의 일이라고? 겨우 이런 일로?'

'이게 진심이라면 넌 정말 후회할 거야. 진짜로.'

'아니야. 이건 너무 극단적이라고 말하며 한 발 물러설까?'


우리 부부의 안 맞음을 먼저 구구절절 설명한 건 나였다. 꽤 긴 기간의 냉전을 종료하고자 먼저 메시지를 보냈지만 나름대로 해결점을 찾기 위한 변명과 설명이었다.


그것을 모를 리 없을 텐데 이런 답변이라니.


하지만 내 자존심은 여태 살아온 습관을 포기하지 않았다. 손가락은 주저 없이 동의하는 답변을 회신했고 그것이 끝이었다.


o o


심지어 나는 끝까지 우위에 있는 듯, 성의 없는 문자로 피드백을 주었다. 거의 10년을 같이 산 배우자에게 이런 태도로 동의하는 것은 마음에 걸렸지만. 뭐. 될 대로 되라지.


정말 끝이 아닐 수도 있다는 여분의 생각은 잠시 머리 한편으로 보내고, 우리는 서로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가타부타 덧붙임 없이 결별 동의 의식을 치렀다. 이혼의 합의는 매우 쉽게 일어나지만 진짜 헤어질 결심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 순간에 조금 더 대화를 진행했다면 다른 결과가 나왔을지도 모른다. 이때 지키려고 했던 자존심은 결혼생활의 가장 해로운 바이러스였겠지.


그 바이러스는 끝내 치료되지 못했고 법원의 판결문을 들고 나와 구청에 이혼신고를 하는 날까지 계속되었다.

자존심(自尊心)의 사전적 정의는 남에게 굽히지 아니하고 자신의 품위를 스스로 지키는 마음이다. 굽히지 않았지만 나의 품위를 지켰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알량한 자존심을 조금 덜어냈다면 나뿐만 아니라 수많은 예비 돌싱들이 탄생 되지 않았을 텐데.


우리 부부는 이혼을 동의하기 1년 전부터 대화를 거의 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사소한 문제였지만 그간 쌓인 것이 누적됐나 보다.


현재에 만족하며 손해 보더라도 여유롭게 살려고 하는 나, 그리고 본인이 그린 삶 위에서 꼼꼼한 계획과 실행을 원하는 아내와의 가치관 차이가 가장 큰 이유다. 누가 옳다고 볼 수 없는 문제이고.


다만 오랜 시간 여러 모로 방법을 바꿔가며 같이 살아오다 타협점을 찾지 못해, 거의 10년 만에 헤어짐을 선택했다.


나에게 이 시기는 악몽과도 같았다. 거의 20년 가까이 책상에서 쪼그려 야근과 철야를 견뎠던 육체는 고장이나 문제가 생겼고, 난생처음 겪어보는 병마와 싸우느라 몸과 마음이 약할 때로 약해져 있던 것이 시련을 극복하지 못한 가장 큰 원인이 되었다.


발병 후 누워만 있던 나는 혈혈단신으로 이 병원 저 병원을 찾아다니며 치료를 받는 동안 눈길 한번 안 주던 아내가 너무 미웠고, 결국 수술하는 날에도 어느 병원인지 묻지 않았던 그녀에게 마지막 자존심을 부리게 되었다.


의사결정 후 먼저 움직인 것은 아내 쪽이었다. 개인 짐을 먼저 친정으로 조금씩 보냈다. 날이 갈수록 황량해지는 집 안 구석구석이 눈에 보였다. 그날 이후 대화를 거의 하지 않았고 서로의 끼니와 안부도 묻는 날이 없었다.


우리 부부에겐 자식처럼 아끼는 고양이가 한 마리 있었다. 항상 먼저 퇴근한 아내가 거실에서 고양이를 쓰다듬고 있었다. (이후에는 저녁식사를 같이 먹는 일이 없어 회사 근처에서 먹고 들어왔다.) 눈치 없는 고양이는 퇴근한 내게 항상 달려와 머리를 비비며 옹알거렸다.


냐옹. 냐아옹.


이 모습을 애써 외면하는 그녀와 고양이에게 시선을 주는 나. 그 사이에 울리는 울음소리는 왠지 더 서글프게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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