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하면 어때 #3
어리고 젊을 때 내 모습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샐러리맨이었다.
당시 몸담은 회사는 계열사가 수십 개인 대기업이다 보니 전통적인 위계가 철저했고 보수적인 집단이었다. 사회화가 덜 되고 할 말하고 사는 내가 승승장구할 일은 없었다.
다행히 내가 소속된 프로젝트 그룹에는 나이와 입사 시기가 비슷한 몇 명이 친구처럼 지내서 큰 어려움 없이 회사생활을 하고 있었다.
연말연시가 된 어느 날, 우리는 하루 일과를 끝내고 회사 송년회 장소로 예정된 어느 호텔로 이동했다.
나를 포함한 일행은 회사 고위직이나 중심 계열의 임원들과는 거리가 멀어, 행사 진행을 무시한 채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구석에서 준비된 뷔페를 조용히 먹고 있었다.
그중 한 명이 말했다.
"쩝쩝. 비싸 보이는데 막상 먹을 게 없구먼. 아! 저기 김 부장님 옆에 걸어오는 친구가 이번 신입 채용에서 우리 팀으로 배정된 걔인가 봐."
싸구려 입맛 탓인지, 뷔페 음식 중에서도 분식만 골라 먹던 나는 잠시 얼굴을 돌려 그쪽을 바라봤다.
한눈에 봐도 늘씬한 키와 굽 높은 힐, 짙은 교포 화장이 범상치 않아 보였다. 누군가 설명을 덧붙였다.
"이번에 K사 물류시스템을 일본 장비로 구축하는 프로젝트가 생겼는데, 일본 엔지니어들과 통역도 필요하고 해서 겸사겸사 채용했대."
통역과 IT 개발을 동시에 하는 능력자인데 외모도 이쁘다는 생각을 하며 음식을 씹기 위해 입을 열심히 움직였다.
곧 그 신입사원에 대한 생각은 잊은 채 빨리 먹고 이 자리를 도망갈 궁리를 했다. 당시 인천에서 직장을 다녔는데 서울 광화문까지의 출퇴근은 항상 고된 일이었다.
***
새해가 되고 꽃피는 4월쯤 회사 워크숍 소식이 들렸다.
"김대리. 요새 별일 없지? 이번 팀 워크숍 빠지지 말고 꼭 와."
다른 계열사의 프로젝트에서 일하고 있어 원격지에 있는 내게 온 팀장의 메시지였다. 주말에 가는 워크숍에 대한 불만이 가득했지만 공손하게 ‘네’라고 대답할 수 밖에.
우리 팀장은 정말 드라마에서만 보던 일꾼이었다. 오전 8시부터 회의하는 회사 대표 덕분에 모든 팀장 이상의 보직자는 회의 준비를 위해 새벽같이 출근했으며, 할 일 없이 주말에 출근하는 그놈의 대표 때문에 주말까지 출근하는 모양새였다.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저렇게까지 하나 싶었지만, 저 자리는 그런가 보다 하고 큰 의구심은 갖지 않았다. 다만 노력해서 팀장이 되어도 저런 생활이라면 큰 매리트가 없겠다는 생각에 훗날 이직을 결심한 계기가 되었지만.
어찌 됐건 워크숍 당일이 되어서도 느긋하게 출발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어이없는 일이지만 길이 막혔다는 핑계를 대면 된다고 생각했다. 양평의 한 펜션이었는데 막 도착해서 짐을 풀고 나니 다들 저녁식사 준비로 분주했다. 친한 사람이 몇 없어 뭐라도 도울까 해, 상추를 들고 가서 씻어왔는데 한 차장이 소리쳤다.
"야. 김대리. 상추를 따뜻한 물에 씻어오면 어떻게! 아놔!"
아. 젠장. 그날 알았다. 상추는 찬물에만 씻어야 하는 것을.
다들 깜짝 놀란 얼굴로 나를 놀렸고, 의도한 것은 아니었는데 분위기가 좀 좋아진 것 같았다.(물론 나만의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한바탕 욕 아닌 욕을 먹고 구석에 얌전히 앉아있을 무렵, 나보다 더 늦게 도착한 여직원이 있었다. 그리고 내게 꾸벅 인사를 하며 앞에 앉았다.
"안녕하세요. 처음 인사 드립니다. 작년에 입사한 이** 라고 합니다."
고개를 들어 같이 인사하고 나의 직함과 이름을 말하면서 그녀의 얼굴을 봤다. 그 여직원은 작년 송년회에서 본 그 신입사원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지각생으로 나란히 마지막 테이블에 앉게 되었고 덕분에 친해졌다.
1박 2일 일정의 워크숍을 마치고 각자의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자차 없이 온 직원들은 집으로 가는 동선이 비슷한 차주에게 카풀을 부탁하며 분주하게 돌아다녔는데 내 앞으로 한 여성이 다가왔다.
"대리님. 저 좀 데려다주세요!"
오우. 이것 봐라.
쿨하게 "그래. 타~" 라는 말을 하려는 순간.
대답을 듣기 전에 내 차에 타는 그녀.
그 모습이 꽤 당돌해 멋쩍었는지 자연스레 콧등을 만졌다. 그 당시 내 차는 2인승이었는데 그녀가 타고나니 아무도 태울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