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가 많지는 않지만 아직 틀이 잡히지 않은 병원에서는 모두 분주하다. 나른한 환자 대기 방송이 나오고 핸드피스 돌아가는 소리는 쉴 새 없이 윙윙 울린다. 신기한 사람들은 축지법이라도 배웠는지 다들 종종종종 걸음 소리도 내지 않고 뛰어다닌다.
그런데... 이상하다.
나만.. 안 바쁘다?
국가고시를 치르고 거의 곧바로 첫 취업을 했다.
공부하는 내내 크게 흥미를 느끼지 못했던 것에 비해 진짜 치과위생사로서의 시작은 아주 흥미로웠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아이가 세상 모든 게 신기하듯 나는 치과에서의 모든 게 새로웠다. 학교에서는 먼 나라의 이야기인 듯 항상 낯설기만 했던 것들이 이제 생생하게 손만 뻗으면 닿을 곳에 있었다.
내가 처음 취업했던 때는 한참 춥고 밤이 길었던 겨울 중의 겨울, 1월이었다. 진료에 투입되기 이전에 신입 교육이 우선이었던 터라 그 겨울 내내 별을 보며 출근해서 달을 보며 퇴근하는 게 일상이었지만 힘든 줄도 모르고 새로운 배움들에 설레기만 했다.
운이 좋게도 규모와 체계가 있는 곳으로의 첫 취업이었던 덕에 동기들도 많았고 받을 수 있는 교육들도 넘쳐났다. 아직 아무것도 알지 못했던 상태에서의 배움이었던 탓에 당시에는 그 값어치를 알지 못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그때의 교육에 얼마나 많은 전문가들의 노력이 할애되었으며 다시 들으려야 들을 수 없는 소중한 배움들이었는지 알 것도 같다.
갓 취업한 1년 차에게는 아직 병원의 생리도, 분위기도, 진료 자체도 낯설기만 하다. 아직 분위기 파악조차 되지 않은 1년 차에게 "오늘 바빴어?"라고 묻는 건 전혀 의미가 없다. 대부분이 사실과 다르기 때문이다. 모두가 바빠서 종종걸음으로 뛰어다니는 날에도 "아뇨, 별로 안 바빴어요."라고 덤덤히 대답할 수도 있고 환자가 뜨믄뜨문 한 두 명 있던 중에도 "어휴, 너무 바빴어요" 라며 벌게진 얼굴로 숨을 몰아쉴지도 모른다. 이건 흥미롭게도 거의 대부분의 신입 치과위생사들이 마찬가지이다. 어느덧 꼰대 선배가 되어서는 갓 들어온 1년 차 후배들에게 장난 겸 묻곤 하면 항상 저런 맥락의 대답들이었다. 매번 물으면서도 매번 재미있어서 등을 쓸어주며 웃곤 했었다. 아직 전체보다는 내 발 밑만 보이는 시기다. 그 상태에서는 아무리 모두가 바빠도 내가 투입될 타이밍을 알기 어렵고 나 홀로 멀찍이서 바라보는 전지적 작가 시점 인양 여유로울 수 있다. 반대로 환자가 단 한 명인 시간에도 나에게 무언가 주어진다면 한껏 상기된 얼굴로 동동거리며 세상에서 제일 분주한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말이다.
하지만 걱정할 것은 없다. 내 발 밑만 보이면 일단걸음을 시작할 수 있다. 한 걸음 한 걸음씩 걷다 보면 언젠간 앞이 좀 트이고 멀리까지 한눈에 보이는 그런 날이 온다. 그건 마치 터널 안에서의 초보운전자와 같다. 도착점에 무엇이 있는지 알지 못한 채로 헤드라이트로 내 눈 앞만 겨우 비추며 계속 나아가다 보면 어느새 발 밑은 터널의 끝에까지 닿아 있고 비로소 밖이 보이기 시작한다.
하루하루 울고 웃으며시간이 어찌 가는지도 모르게 겨울이 끝나고 봄이 되어간다. 봄이 지나고 여름이 될 즈음이면 이제 내가 있어야 할 곳과 내가 해야 할 일 정도는 알게 된다. 겨우내 쌓인 눈이 슬며시 지면에 스며가듯 나도 모르게 주변에 스미고 익숙해져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