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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퍼러리의 의미

노력의 결정체.

by 글짓는써니

여느 때와 다름없이 지친 일과가 끝나고 병원 앞의 작은 술집에 들렀다. 워낙에 호화롭고 삐까뻔쩍 유흥하기 좋은 곳 한복판에 있었던지라 어디든 나가면 부르는 곳 천지였다.


싸랑하는 동기이자 언니와 한잔, 두 잔, 석 잔, 넉 잔... 쓴소리 단소리 매운 소리를 해가며 마시다가 감정에 무슨 동요가 생긴 건지 신나게 팔짱을 끼고는 다시 불 꺼진 병원으로 돌아간다. 슬쩍 문을 따고 잠금을 해제하고는 아직 열이 채 식지도 않은 컴프레셔를 다시 켜고 진료실로 들어간다.


각자 체어 하나씩을 잡고 앉아서는 느닷없이 템퍼러리를 깎기 시작한다.

드륵드륵위이이이이이~~~~~~잉


그렇다, 이게 바로

"취중 템퍼러리"




템포라리 크라운( temporary cr )은 임시치아다.

치아를 씌우기 위해 본을 떠서 제작하는 동안 헐벗고 있는 치아를 임시로 덮고 있는 작고 얇은 플라스틱.


물론 의미는 아주 여럿이다.

금니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는 동안 깎아서 약해져 있는 치아를 보호해야 하며 주변 치아와의 적정 거리를 유지하도록 동요가 없게 잡아주어야 하고 충치를 제거하고 치아를 다듬느라 다친 잇몸도 힐링시켜야 하는 것이 그것이다.


환자의 입장에서는 그저 '잠깐 붙여놓는 의미 없는 약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 치과위생사에게는 내 진료 스킬과 능력을 표현할 수 있는 아주 적합한 도구라는 것이 아이러니다.



템퍼러리는 중요하다.

치과위생사라면 누구나 배우고 누구나 하지만 누구나 잘하지는 못하는 일. 짧은 시간 내에 마진과 컨택과 컨투어를 맞추어 깎아내는 일. 템퍼러리를 잘 깎는다는 것은 치아의 형태를 완벽히 안다는 것이고 컨택과 교합의 원리를 이해한다는 것이다. 물론 머리로 모양을 알고 이론을 안다고 해서 되는 일은 아니다. 첫째도 손, 둘째도 손. 손기술이 바탕이 되어야 하는 일인지라 흔히 말하는 똥손은 템퍼러리의 허들을 넘지 못하고 지치는 경우가 허다하다.


다행히도 나는 굳이 따지자면 금손이다. 다이아몬드손까지는 아니더라도 적당한 금손 정도는 되어 지금도 끄적끄적 꼼질꼼질 무언가를 만들고 친한 지인의 만들기 의뢰를 받기도 한다. 치과위생사가 되기 전에는 나 스스로 손기술이 좋다는 걸 전혀 알지 못했다. 그저 만들기를 좋아해서 할 뿐 무언가 배워본 적도 없는 나는 그림도 글씨도 그리 잘 끼적이진 못했기 때문이다.


그랬던 1년 차 신입에게 신선한 '만들기 미션'이 생긴 거다. 이 투박한 기계로 치아를 깎으라니... 정말 시작만 하면 만들기의 재미에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운 좋게 입사 후 첫 진료과가 보철과였다. 그것도 심미보철과.

게다가 담당 원장님은 진료 스킬도 뛰어난 데다가 양심과 매너까지 갖추신 보기 드문 명의셨다.(내 기준 지금까지 명의시다)

맨 처음부터 그분의 진료를 보고 그런 분의 템퍼러리를 배울 수 있었다는 건 지금 생각해도 대단한 복이었다.


그 덕에 1년 차 때부터 탄탄히 배우고 2년 차, 3년 차... 10년 차가 넘어가는 순간까지도 어디 가서 템퍼러리 때문에 걱정하는 일은 없었다. 비록 한 번의 이직이 있었지만 두 번째 병원에서는 모두 놀랄 정도로 손에 덴쳐바가 달린 듯이 깎아댔다. 그건 분명 치과위생사에게 겉으로 드러낼 수 있는 아주 큰 능력이긴 했다.



그저 금손을 타고난지라 큰 노력도 없이 그리 되었다 생각하는 사람들이 참도 많았다. '너는 원래 잘하잖아~' 라는 말을 많이도 들었다. 칭찬인 듯 씁쓸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일일이 설명할 필요도 없고 어울리지 않는 변명을 할 필요도 없지만 난 억울할 정도로 엄청 노력했다. 노력을 티 내는 것마저 능력이라면 나는 그런 능력이 제로였던 것뿐이다.


모두들 깎는 데에만 열중할 때 치아형태학 책을 지겹도록 들여다봤고, 모눈종이에 수시로 그려댔다. 맨 종이에까지 그린 치아 모형만 해도 수백 개는 될 듯하다. 스킬을 기르겠다고 의미 없는 정육면체도 엄청 깎아봤다. 손을 쓰는 자세가 좋지 못해 매일 넷째, 다섯째 손가락에 테이프를 칭칭 감고 습관을 다졌던 시간들이 있었다.


마냥 막막해하고 어려워하는 동기들, 후배들에게 책을 들이밀고, 그림을 그려보라, 다른 것을 깎아보라 이야기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너는 원래 잘하잖아~'라고만 말하는 사람들의 공통된 특징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의 말을 듣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자기 기준에서 의미 없어 보이는 노력은 하지 않는다. 그저 겉으로 드러나는 당장의 결과만을 원한다. 그런 경우를 반복해서 보다 보면 나는 그냥 '원래 잘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훨씬 편해지곤 한다.


"쟤는 원래 잘하는 애"라는 생각은 스스로를 합리화할 수 있는 아주 강력한 방패이자 발전을 가로막는 단단한 가림막이다. 나는 노력해 봐야 어차피 그만큼 되지 않을 것이라는 절망감은 결국 노력조차 하지 않아도 되는 편안함을 선사한다.






이 템퍼러리 크라운이 치과위생사의 전부는 물론 아니다.(절. 대. 아니다.) 치과위생사에게 중요한 것들은 아주 다양하고 나를 드러낼 수 있는 과목 또한 여럿이다. 템퍼러리는 그중 아주 작은 허들에 불과하다. 하지만 중요한 건 작은 허들조차 넘지 않고 편안함만을 추구하는 사람은 다른 허들 또한 넘기 어려울 것이라는 것이다.



점점 기공소에 의뢰하여 받는 기성 템퍼러리를 사용하는 곳이 많아진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00% 맡겨서 제작할 수는 없는 과목이라는 것은 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것이다.

떼어질 수 없는 관계라면 결국은 친해지는 방법이 가장 현명하다.







꼰대치과위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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