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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엔 Jan 18. 2020

1회 내가 다닐 학교가  '호그와트' 라니

11년 차 유학생의 중국 적응기

나 홀로 중국 유학기 그리고 살아남기

 


 1회- 내가 다닐 학교가 '호그와트' 라니-  


   2000년대 초 대한민국에 조기유학 열풍이 대단히 불어 닥쳤던 기억이 난다. 학교에서 많이는 아니지만 반에서 한두 명씩 해외로 유학을 가는 친구들이 보였다. 그때 가장 기억에 남았던 건 그 친구들이 항상 유학을 가기 전에 담임 선생님이랑 어딘가로 가서 손에 인주를 묻혀 왔었는데 나는 항상 그게 부러웠다.


  왜냐하면 그건 한국에서 기본교육과정을 포기한다는 서류에 도장을 찍는 거였기 때문이다. 중학생이었던 나는 어린 마음에 그냥 저 빨간 인주를 엄지손가락에 묻혀 찍으면 지긋지긋한 학교에 안 다녀도 되니 모든 게 다 풀리는 궁극의 빨간색으로만 보였다. 그래서 참 부러웠다. 물론 나뿐만 아니라 반의 모든 친구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다들 학교에 가는 건 누구나 싫었으니까!


  하지만 그 빨간색 인주가 그리 꿈같은 일이었던 건 아니다. 우리 엄마는 항상 자식들을 해외에서 공부시키고 싶어 했다. 우리 집은 나와 2살 터울의 여동생이 있었는데 엄마랑 아빠는 여동생은 아직 어리고 막내라는 이유로 나를 항상 해외 공부 1순위 타깃으로 삼고 있었다. 우리 엄마가 상상하는 해외에서의 유학이란 푸른 들판에서 뛰어놀다가 아무 데서나 누워 서 햇살을 보며 책을 읽고 분위기에 취해 어떠한 도(道)를 터득하는 그런... 다른 엄마들이 상상하는 해외 명문대 입학이라는 생각과는 약간 거리가 멀었다. 엄마는 그런 소녀적이고 감성적인 본인의 상상을 나와 동생에게 어릴 때부터 항상 이야기해주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가 나에게 진지하게 물었다. 미국이나 중국에서 공부한다고 생각하면 어떤 기분이 들겠냐고... 갑자기 던진 엄마의 질문에 나는 당황하기보다는 걱정이 앞서던 기억이 난다. 그때는 무조건 다른 거보다도 엄마 아빠랑 떨어져 지내는 게 무서웠다. 아예 상상이 되지 않았다.


  나는 학교가 끝나면 바로 집에 와서 엄마와 시간을 보내는 스타일의 아이였다. 친구들과 학교가 끝나면 피시방을 간다거나 놀러나가지 않았다. 또 노래방도 친구의 생일에만 가는 방안 퉁수이었다. 그렇게 지냈던 나는 아예 해외로 가서 혼자 공부하라는 엄마의 말이 무서웠다. 한 번도 가족과 살지 않는 상상을 한 적이 없다.


  그렇게 며칠을 고민하다가 나는 기가 막히게도 중국 유학을 가기로 결정했다. 왜냐하면 친구들이 손에 찍어오는 빨간 인주를 손에 묻히고 싶기도 했지만 유학 설명회를 다녀와서 나는 걱정보다는 꿈에 가득 차있었다.


  엄마를 따라 간 서울 강남 어딘가에 위치한 그곳은 중국의 한 학교를 설명하는 자리였다. 그 학교는 실로 대단하게 묘사되었는데 중국 상하이에 위치하고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대지 20만 평의 학교 캠퍼스의 규모와 해리 포터에서 나 볼 수 있었던 학교 건축 스타일, 최첨단 기숙사 시스템과 최고급 우수한 선생님과의 교육으로 나를 중국 전문가로 만들어 준다고 했다.


  또한 매번 한국 학생들을 위해 한국식 밥을 제공하며 정수기에 버튼을 누르면 주스가 나오고 수영장 체육관을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다고도 했다. 또한 영어 시간엔 영국 출신의 외국인들이 와서 영어 공부도 시켜 준다고 했으니 굳이 미국에 갈 필요도 없겠다 싶었다. 그렇게 나에게 곧 마법이 펼쳐지겠구나 생각했다. 엄마를 떨어져 지낸다는 것이 걱정이긴 했지만 정수기에서 버튼을 누르면 주스가 나오고 호그와트 같은 학교생활을 한다는 생각에 나는 영화 해리포터 속 주인공 해리를 꿈꾸고 있었는지 모른다.


  내가 긍정적으로 생각하니 유학 준비는 일사천리로 진행이 됐다. 나 역시도 빨간색 인주를 엄지손가락에 묻혀 자퇴서라고 기억하는 곳에 도장을 찍었고 한국 학교에서의 기억을 잊었다. 친구들과 선생님과의 이별이 아쉬울만했지만 난 그러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는 중국 호그와트에 입성하는 예비 학생이니 세상 즐겁기만 했다. 유학 설명회에서 준 학교 팸플릿을 침대에 누워 여러 번 보고 팸플릿 겉표지에 있는 노을빛에 비친 의리의리 한 중국 학교의 모습을 보며 나는 순수한 꿈을 구웠다. 버튼을 눌러 무슨 주스를 마실까? 에버랜드보다 큰 학교에서 경찰과 도둑 놀이를 친구들과 하는 상상... 뷔페식으로 차려진 식당에서 맛있는 음식을 우걱우걱 먹는 상상... 어느새 엄마와 아빠와 떨어져 지내야 한다는 걱정은 나의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그렇게 몇 주를 꿈에 부풀었고 짐을 싸고 인천공항으로 향했다.


  2005년 2월 24일 나의 나이 15세 때 같이 가는 몇 명의 한국인 학생들과 학교 관계자 사람들이랑 아시아나 상하이(上海)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공항에서 엄마와 아빠와의 이별이 너무 슬프긴 했지만 그것도 잠시 정말 순수하게 호그와트에 입성한다는 그 기분이 나는 설레었다.


  물론 나는 낯을 가리는 스타일이라 같이 가는 몇 명의 한국 친구들과 이야기를 주고받는 게 약간은 쑥스러웠지만 우리들의 눈에는 예비 호그와트에 입성한다는 설렘을 눈으로 읽을 수 있어서 금방 친해질 것 같았다. 그렇게 2시간의 비행이 끝나고 상하이에 도착했다. 그날은 비가 내리는 날씨였던 걸로 기억한다. 부슬부슬 내리는 비를 피해 학교에서 준비한 버스에 올라 이제 호그와트로 향하는 길이다. 비가 내리는 호그와트는 어떤 모습일까 상상했고 학교 옆에 엄청나게 큰 호수가 있다던데 학교에서 바라보는 야경도 너무 멋있을 것 같았다.


  한참 상상 끝에 나는 잠이 들었고 그렇게 잠시 눈을 붙이다가 다시 일어났다. 나는 일어나자마자 버스 앞에 놓인 전자시계를 보았다. 분명 한참을 온 것 같았는데 버스는 아직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고 상하이 끝 쪽에 위치했다는 학교는 아직 먼 것 같았다. 분명 같은 상하이인데 왜 도착하지 않지?라고 생각했지만 중국은 우리나 보다 훨씬 크다고 했으니 그렇게 큰가 보다 생각했다.


  중국에 가기 전 아빠가 사준 목걸이형 검은색 아이리버 이어폰을 귀에 대고 음악을 들으며 난 설레고 있었다. 그렇게 한 시간 두 시간... 부슬부슬 내리던 비는 빗줄기가 제법 굵어졌고 버스 창밖에 비친 풍경은 시골 농촌 풍경으로 변하고 있었다. 그때 문득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무언가 친절하던 학교 관계자 사람들이 덜 친절하게 느껴졌다.


  물론 나뿐만 아니라 내 옆에 앉아 있던 친구와 눈이 마주쳤다.  그 녀석도 그렇게 느꼈을 것이다. 버스는 점점 시골길로 향했고 전혀 상하이스럽지 않은 비포장도로를 달렸다. 버스가 울퉁불퉁한 길을 달릴수록 엄마와 아빠의 얼굴이 떠올랐고 울적해지기 시작했다. 뭔가 무서웠다. 분명 소개할 때 봤었던 풍경들은 아니었다. 비가 마구 내리던 2005년 2월 24일 중국 장쑤(江苏) 성, 그때는 한자를 몰라 그냥 지나쳤지만 우리 버스는 상하이를 지나 중국 장쑤 성 우시(无錫)로 향하고 있었다. (상하이에서 버스로 약 4시간 거리) 그렇게 나는 인생 최대 사기를 중학교 때 맞이해야 했다.


과연 나는 중국 호그와트에 무사히 입성할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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