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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엔 Jan 22. 2020

4회 소중한 미션 : 방 탈출하기

11년 차 유학생의 중국 적응기


나 홀로 중국 유학기 그리고 살아남기

4회 - 소중한 미션 : 방 탈출하기-


  적응하지 못할 것 같았던 험난했던 우시에서의 중학교 시절이 끝나고 고등학생이 되면서 나는 우시에서 베이징으로 전학을 갔다. 전학을 간 이유는 간단하다. 베이징이 교육적으로 시스템 자체가 잘되어 있었고 소위 상위 3개 대학이라고 말하는 베이징대, 청화대, 인민대를 가기 위한 입시 시스템이 가장 잘 구축된 도시이기 때문에 고등학생이 되자, 엄마의 설득을 통해 베이징으로 전학을 갔다.


 물론 우시에서 더 이상 있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나의 마음속엔 여전히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향수가 가득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니, 공허함은 많이 사라진 거 같았다. 처음엔 한마디도 못했던 것에 비해면 중학교 과정이 끝나니 생활중국어는 하고 싶은 말은 다 할 정도가 되었고 수업을 따라갈 정도로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나름 스스로 뿌듯했고 어느 정도 자신감도 생겼다.


  베이징에서의 고등학교 생활 역시 기숙사에서 지냈는데 일층이 남학생 기숙사였고 이층이 여학생 기숙사였다. 베이징의 학교는 우시의 무너진 호그와트와 비교가 안될 정도로 작았지만 아늑하고 좋았다. 그리고 노란색 빛이 들어간 학교의 전경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는 느낌을 받기에 충분했다. 학교 생활 역시 오전과 오후에는 중국애들과 함께하는 차반 수업을 했다. 수업이 끝이 나면 바로 과외 수업이 이루어졌고 저녁을 먹고 나면 또 부족한 과목에 대한 과외를 받았고 마지막 시간에는 학교에 소속되어 있는 외국인 학생들과 저녁 자습을 하는 그런 시스템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또 새로운 생활을 적응하기에 바쁘고 눈치 보고 여념이 없었던 나에게 재미있는 일탈의 시간이 다가왔다. 그때 동갑 또래 친구 두 명과 한 살 터울의 동생이 있었는데 같이 우시에서 베이징으로 넘어와서 그랬는지 아주 잘 지내고 의지했다. 그중 동갑내기 친구 중 한 명이 우리들 중에서 가장 모험심이 강한 친구였는데 우리에게 저녁에 기숙사를 탈출해서 놀다가 들어오자는 재미있는 제안을 했다. 물론 놀다가 들어오자는 게 PC방 가자는 것이다.


  하지만 중국에서 PC방이라는 공간은 참으로 특이하다. 중국은 한국과 다르게 미성년자가 피시방에 들어가는 것이 불가하다. 청소년의 건강과 유해성 등 수많은 이유가 있었다. 또 항상 신분증 검사를 했기 때문에 나처럼 고등학생들이 피시방에 가는 것이 불가능했다는 말이다. 하지만 컴퓨터 게임은 하고 싶었던 나이였기 때문에 참으로 피시방에 가지 못하는 것이 불만이었다. 또한 한국에서는 피시방을 가는 것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던 터라 더더욱 짜증이 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참고로 나는 게임을 절대 잘하지 못한다. 마우스와 컴퓨터 자판이 동시에 안 되는 손 고자이다.


그랬던 나에게 친구가 기숙사를 탈출하고 PC방을 다녀오자고 했던 것이다. 그렇다 참으로 흥미 있는 제안이었고 이 학교에서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일탈 중 하나였던 것 같다. 하지만 기숙사를 밤에 탈출하기는 참으로 어려웠다. 학교는 정문과 후문을 두고 있었다. 정문 뒤로 바로 학교 본 건물과 체육관이 위치했고 그 뒤에 학교 운동장과 농구코트가 자리 잡고 있었으며 그 뒤에 바로 기숙사와 후문이 위치했다. 위치상으론 후문으로 나가 PC방으로 가는 것이 가장 빠른 통로였지만 후문에는 경비아저씨들이 지키고 있었고 후문 앞과 후문과 기숙사가 지나가는 통로에 시시티브이까지 설치되어 있는 상태였다.


  게다가 후문은커녕 기숙사 밖으로 나오기도 힘들었는데 기숙사 일층 출입구와 복도 끝에 CCTV가 달려 있었고 출입문 바로 앞방이 사감 선생님 방이었기 때문에 도통 이 철병 방어를 뚫는 것이 보통이 아니었다. 또 그 사감 선생님은 우 씨 성을 가진 연세가 지긋하신 분이셨는데 그분의 귀는 소머즈에 가까워 우리의 발자국이 기숙사 정문에 닫기만 하더라도 문을 열고 나오실게 뻔했다. 우리 네 명은 며칠에 걸쳐 작전 회의에 들어갔다. 대체 어떻게 해야 방 탈출이 가능할까? 새벽에 피시방에 가면 외국인라서 그냥 눈감아 준다는데 어떻게 이 기회를 이용할까? 우리는 한방에 모여 작당에 들어갔다.


나: 우 라오쓸(오 씨 성을 가진 기숙사 선생님)이 발자국 소리 안 들리게 신발을 손에 들고 수면양말을 신고 복도를 지나 가면 안 들리지 않을까?


친구 1: CCTV는?


나: 어


친구 2:아님 저녁 자습 끝나고 기숙사에 들어가지 말고 교실에 있다가 나갈까?


친구 1:야 자기 전에 방에 인원 검사하는데 말이 되냐?


나: 똥 싼다고 하면 되지 룸메한테 부탁해서


친구 1:우 선생님이 똥 다 쌀 때까지 기다리고 있을 거야


나:어


  하... 도통 답이 나오질 않았다. 이 철통방어란 정말로 뚫기 어려웠고 이탈리아 국가대표팀의 수비보다 견고한 통곡의 벽이었다. 이제 막 17살이 된 우리들이 뚫기 어려운 시스템이었다. 하지만 우리에겐 나가서 스타그래프트와 카오스를 하고 싶다는 열정이 있다. 그것도 엄청나게 뜨거운!!! 이견 고한 시스템을 이길 수 있을 만한 열정!!! 나는 항상 불가능을 가능하다고 생각할 때 2002년 월드컵 때 우리나라 대표팀을 생각한다. 누가 대한민국이 월드컵 4강에 들어갈까? 라 고 생각했는가!!! 누가 16강에서 마지막 연장 역전골로 아주리 군단 이탈리아를 이기고 8강에 갈 것이라고 생각했느냐!!!!!!


그렇게 며칠을 작전을 짜다가 거의 포기에 다를 무렵 끝에서 두 번째 방에 쌍둥이 동생들이 살고 있었는데 평소에 별로 친하지 않았지만 가끔 그 방에 들어간 기억이 났다. 별로 친하지 않았던 터라 물건만 전해주고 오려던 찰나... 나와 내 친구의 두 눈에서 무언 가가 들어왔다. “어!!! 재네 방은 쇠창살이 왜 이렇게 사이 간격이 넓은 것이며 얆은 거지?”. 올레!!!!!!!!!!! 나와 친구는 아무 말 없이 서로 창문을 보며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고 서로 부등 껴 앉으며 소리 질렀다. 다시 방으로 들어와서 우리는 다시 이야기를 했다.


친구 1: 저 방은 북향으로 창문이 있으니까 바로 나가면 운동장이잖아 거긴 시시티브이도 없고


나: 웅 맞아 나가서 정문으로 가는 것보다는 담에다가 뭐 라도 세워서 가면 편할 것 같아


친구 2: 위치가 딱 이야 몰래몰래 담에 뭐 올려 다 놓자 담도 낮으니까!!!


  한번 일이 풀리니 정말 쫘아아아아악 풀리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우린 쌍둥이 형제들에게 부모님이 택배로 보내준 한국 과자들을 들고 찾아갔다.


친구 2:너희가 그렇게만 허락해주면 우리가 매번 너희 먹고 싶은 과자 제공해줄 수 있어


쌍둥이 형제들:당연하죠~ 과자만 먹을 수 있다면


  한국 과자를 싸 들고 간 우리의 모습은 타지에서 기숙사 생활을 하며 먹을 것이 없던 중고등학생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큰 뇌물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일주일 정도의 시간을 두고 틈이 날 때마다 그 방에 들어가 쇠창살을 흔들었다. 일주일 후 우리가 창문을 통해 나갈 때 우리의 몸이 들어갈 정도로... 아침에 일어나서 점심시간, 오후 수업 끝나고, 과외 가기 전에 자습 이간에 몰래몰래... 그리고 쌍둥이 형제들도 한국 과자가 좋았는지 자기들이 나서서 우리가 가지 못할 때 쇠창살을 흔들어 놓았다.


우린 그다음 프로세스를 실행하기 위해 다시 방에 모였다. 일단 그렇게 나가면 되는데 복도에 있는 CCTV는 어떻게?


”아 그거“ 라 며 친구는 대걸레를 들었고 저녁 자습이 끝나고 들어 올 때 랑 저녁 복도 청소를 할 때 대걸레로 시시티브이를 돌려 놀려 놓으면 된다고 했다.


  친구 2는 공부는 조금 딸리는 친구였지만 정말 이쪽으로는 똑똑한 친구였고 우린 그날 저녁 청소시간에 CCTV를 걸레로 돌려놓았고 다들 새벽 2시에 쌍둥이방에서 만나자고 했다.

그리곤 쌍둥이들에게 저녁에 자기 전에 문을 닫으면 문이 잠기니 닫히기 직전 까지만 닫아 놓으라고 했다.


  그렇게 두시... 나는 학교 교복을 입었다. 왜냐하면 피시방에서 바로 학교에 등교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방문을 살살 열었고. 동시에 복도에서 교복차림을 한 애들이 3명이 더 눈에 띄었다.


  싸늘하다... 공기가 차갑다... 다들 학교 가는 복장으로 갈아입은 우리는 혹여나 돌려놓은 시시티브이가 비칠까 복도 벽에 붙어 게 다리 걸음으로 쌍둥이 형제 방으로 향했다. 졸린 두 눈을 부릅뜨고 PC방에 가겠다며 교복에 책가방까지 매고 게 다리 걸음을 한 우리의 모습에 순간 웃음이 터져 나왔지만 걸리면 정말 끝장이기에 입을 막고 쌍둥이 방으로 향했다. 쌍둥이 방은 뇌물을 잘 받은 탓인지 문이 기가 막히게 살짝 열려 있었고 쌍둥이 형제는 조금 한 스탠드를 켜고 한국 과자를 먹으며 우리를 기다렸다. 우리 넷은 쌍둥이 형제 방에 다 진입을 했고 우린 창문으로 향했다.


  그렇게 서로 도와주며 같이 노력한 시간들 덕분이었는지 우리 넷을 무사히 창문 밖으로 나갔고 우리가 다 나감 다음 에야 스탠드를 끄고 잠을 청하는 쌍둥이 형제들… 난 그 모습이 참으로 웃겼다. 순진한 얼굴로 항상 다니는 쌍둥이들이 불법현장의 통로가 되다니. 마치 한국 과자를 먹으며 기다리는 그들은 탈북 민들이 압록강을 건널 때 뇌물을 받고 눈감아주는 북한 군인들 같았다. 그렇게 우리는 피시방으로 향했고 아침에 돼 서야 나왔다. 그리곤 정문으로 등교시간이 돼서 학교로 등교하는 중국 학생들 사이에 끼어서 아무렇지 않게 교문을 통과했다!!!


  추운 겨울이었던 걸로 생각난다. 지금 이였으면 춥다고 새벽에 나가지도 않았을 날씨... 그리고 그럴 열정도 없다. 고작 컴퓨터 게임이나 하겠다고 나갔던 수많은 위험을 무르 쓰고 나갔던 나와 친구들... 그리고 생각나는 반성문... 결국에 하도 넒 어진 쇠창살 때문에 학교 경비 아저씨들이 순찰을 돌다가 발각되었다.

셋이 대학교 시절 여행 가서 찍은 사진, 한 명은 빠졌다.

  그때는 그랬다. 걸리면 혼나 줄 알면서도 하고 싶었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친구들과 함께하면 해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항상 추운 겨울과 PC방을 보면 그때 그 생각이 난다. 지금 한 친구는 결혼을 해서 아들을 낳았고 한 명은 지방에서 일을 하고 한 명은 헬스장 차리겠다며 꿈을 꾸고 있다.


  하지만 예전처럼 연락하지 못한다. 그때 그 시절 우리는 알았을까? 춥고 추운 겨울 서로 쇠창살을 나가기 위에 창문에서 밀어주고 나간 사람이 끓어주었던 그때... 우리는 지금처럼 본인들 살기 바쁘다고 연락하지 못할 걸 알았을까? 베이징의 밤하늘에 어둑하고 추운 입김만 나왔던 그 밤에 4명의 검은색 교복을 입고  PC방으로 향하던 고등학교 1학년 학생들이 '미션 컴플리트'라며  얼싸안은 그림자가 나의 키보드 앞을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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