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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엔 Jan 21. 2020

3회 참치 비빔밥을 만들어준  나의  첫 번째 은인

11년 차 유학생의 중국 적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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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나 홀로 중국 유학기

나 홀로 중국 유학기나 홀로 중국 유학기

나 홀로 중국 유학기 그리고 살아남기나 홀로 중국 유학기 그리고 살아남기

3회-통조림 참치 비빔밥을 만들어준 나의 첫 번째 은인-


  혼자서 지내야 하는 중국은 정말 재미없었다. 그래도 중국어를 배우는 것에 재미가 들려서 그런지 그럭저럭 지낼 만했다. 하지만 날 괴롭히는 사람이 생겼는데, 그 사람은 바로 날 관리해준다는 명목으로 계시는 한국인 관리 선생님이었다. 40대의 나이에 노처녀인 그분은 참으로 이상했다. 사사건건 나에게 시비를 거셨다. 예를 들면 먹기 싫은 급식 반찬을 억지로 권한다는 지, 나의 주말 외출 스케줄 동선을 본인이 짠다던 지, 매일 5시, 저녁시간 전까지 남는 자유 시간에 내가 좋아하는 농구를 못하게 막는다는 지... 절대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을 나에게 하셨다. 신기하게도 내가 피해 다니면 귀신처럼 나타나 나의 자유를 억압하는 분이셨다. 특히 그분의 행동 중 가장 마음에 안 들었던 건, 내가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걸 막으셨다. 그것이 나에게는 가장 참을 수 없었다.


그분은 내가 친구들과 함께 있는 걸 좋아하지 않으셨다. 밥을 먹을 때도, 학교를 돌아다닐 때도, 외출을 할 때도 내가 혼자인걸 좋아하시는 특이한 사람이었다. 정말 이해를 할 수 없었고 무슨 이유인지 정말 몰랐다. 나도 노처녀?로 만들 작정이었나...


  어느 날은 너무 스트레스를 받아 나도 모르게 그 선생님에게 이야기했다. “왜 자꾸 친구들과 만나지 못하게 하세요, 공부시간에 지장 주는 것 안지 않아요” 라 고 말했고 선생님은 내게 “네가 다른 아이들에게 나쁜 물이 들 것 같아” 라 고 말씀하셨다.


  그 선생님의 말을 듣고 나면 내가 어울려 놀았던 친구들이 모질고 질 나쁜 아이들처럼 보이겠지만 전혀 그렇지 않은 아이들 이였다. 다들 공부도 열심히 하는 친구들이었고 고작 학교에서 하는 거라 곤 농구와 황폐한 운동장에서 MP3를 들으며 자신들이 먹고 싶은 것을 말하는 게 다였다.


  그렇게 정말 너무 이해가 안 가는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그렇게 몇 주가 지났을까? 그 선생님이 하도 친구들과 노는 걸 방해하며 나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니 나도 한 번은 마음 편하게 주말을 보내고 싶어서 친구들에게 아프다고 둘러대고 학교에 홀로 남았다. 친구들은 나가서 맛있는 것을 사 오겠다고 했고 나는 기숙사에서 혼자 시간을 때우며 심심하게 창밖만 바라보았다. 아무도 없는 기숙사에서 혼자 창밖을 바라보자니 정말 심심했고 우울한 감정이 들었다.


  중국은 대부분의 지역이 평야라서 한 곳을 바라보고 있으면 정말 끝없는 땅들이 펼쳐지는데 나는 개인적으로 그런 풍경을 보면 더욱더 우울 해진다. 정말 저 끝없는 땅들을 바라보고 있자면 저 땅들의 광활함 처 럼 방학은 멀리만 있을 것 같았고 엄마 랑 아빠를 못 볼 것 같았다. 그렇게 분위기에 취해 나의 현실에 취해 너무 우울 해져 있는 찰나 또다시 잘 잡고 있었던 마음이 흔들릴 것 같아서 학교나 걸어보려고 나가려고 했던 찰나 평소에 얼굴만 알고 있던 고등학교 2학년 형이 나에게 찾아왔다.

  

  그 형은 한국인 형이 이었는데 같은 동갑도 아니고 내가 낮을 가리는 성격이어서 잘 볼 수도 없고 이야기도 한 번도 안 해본 형이 이었다. 그렇게 그 형은 대뜸 나에게 “너 밥 안 먹었지 같이 먹자” 라 고 하며 자기 방으로 불렀고 그 형은 커다란 접시에 아침에 식당에서 챙겨 온 밥과 한국에서 챙겨 온 것 같은 참치와 고추장을 넣어서 밥을 막 비볐다.


  나는 아무 말없이 밥을 비비는 것만 쳐다보았고 형이 한입 주길래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받아먹었다. 솔직히 잘 모르는 형이 왜 나에게 밥을 먹자고 하지?라는 경계심도 있었고 나와는 다르게 성격이 활달한 것 같은 이형이 나랑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생 각도 잠시... 한국산 동원 참치와 청정원 초고추장으로 비빈 참치 비빔밥은 너무나 아름다운 맛이 났다. 난 아직도 그때 그 맛을 잊을 수가 없는데 정말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비빔밥이었다.


  고작 참치와 고추장만 넣었는데도 어쩜 이렇게 달달 하기도 하고 고소한 맛도 날까 너무 신기했었다. 주말이라 늦게 일어나 아침도 안 먹고 친구들 이랑 외출도 나가지 않아 배가 너무 고팠었는지 나는 마구 그 비빔밥을 먹어 버렸다. 먹는 도중에 가끔씩 어색한 기류가 흘렀으나 이내 형이 자기 사물함에서 한국 과자까지 풀어줘서 나는 또 연실 입에 과자를 넣었다.


  그리곤 내게 배가 부르냐며 엄마의 눈을 하고 다른 과자를 까는 그 형의 모습에 나는 그 형이 나와 매우 친해질 것 같았으며 한편으론 갑자기 울컥했다. 왠지는 나도 모르겠다.


  음… 추측하자면 아마 내가 중국에 와서 몇 달 동안 누군가에게 이런 호의를 받은 적이 없어서 인 거 같다. 누군가 내게 배가 부르냐고 물어본 적이 없었고 내가 밥을 먹던 말든 신경 써준 사람조차 없었다. 모든 걸 내가 알아서 해결해야 했고 내가 컨트롤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어린 나에겐 스트레스 이었 나보다.

  순간 나의 두 눈은 붉어졌고 나도 모르게 잘 알지도 못하는 형 앞에서 울어버렸다. 그렇게 생에 처음으로 모르는 사람 앞에서 내 개인 적인 이야기를 했고 이곳에서 너무 힘들다며 투정을 부렸다. 그 형은 내가 나이 어린 동생이라 그런지 나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었다. 그리곤 나는 이때가 기회다 싶어 나를 괴롭히는 그 선생님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하나도 빠짐없이... 마치 한 번도 고자질 못해본 사람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엄마에게 이르듯이 구구절절 이야기했다.


  이 이야기는 솔직히 같이 어울리는 친구들에게는 말을 못 했다.


  왜냐하면 내가 그 선생님에게 가장 스트레스를 받는 부분이 친구들과 못 놀게 하는 것이고, 그 선생님이 그러는 이유가 친구들이 질이 안 좋다고 그러는 것인데, 이 이야기를 애들에게 차마 할 수 없었다. 뭔가 그런 말을 하면 친구들과 멀어질 것 같았다.


  하지만 이형은 전혀 관련이 없는 사람이니 나는 충분히 나의 고충을 이야기했다. “그래서 얼마나 짜증이 났는데요, 그 노처녀가 자꾸 따라다니면서!!!” 나의 푸념을 들은 형은 잠시 고민하더니 갑자기 단번에 복수를 해준다고 이야기를 했고 자기 친구 사물함에서 무언가를 뒤지더니 물총 2개를 꺼내 들었다.


  “맨날 퇴근 전에 우리 건물 앞으로 지나간다고 했지? 그때 신나게 헤드 샷을 날려버리자” 형은 흥미로운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제안했고 나는 나 혼자 서는 절대 상상할 수 없는 일을 용기 내어 물총에 물을 채웠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갔고 헤드 샷을 날릴 시간이 되었다. 나와 형은 기숙사 복도에 자리 잡아 몸은 벽에 붙이고 물총만 창문으로 빼내어 그녀가 지나가길 만을 기다렸다.


  저녁 10시가 넘은 시각, 언제나 똑같이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는 그녀가 우리 물총 총구에 포착되었다. 악당을 찾은 우리는 ‘레디~고’를 외쳤다. “쓰으으싹” 물총 장전을 마치고 물총 세례를 날렸다.


  창문 밖에서 들리는 ‘아 아악 ‘... 짜증 섞인 비명소리가 나는 너무 짜릿했다. 더 재밌었던 건 물총을 피하지 않고 물총을 쏜 사람을 찾으려는 노처녀 선생님 덕분에 우리는 목표물을 놓치지 않고 계속 물총 세례를 퍼 부 울 수 있었다.


  나와 형은 서로 낄낄거리며 웃어 댔고 그 선생님은 남자 기숙사로 올라오려고 했지만 중국 교관 선생님이 늦은 시간에 여자의 출입은 안 된다며 그녀를 막아서며 우리의 물총 공격에 완벽한 디펜스를 해주었다.


  그렇다. 선생님의 얼굴에 떨어진 물처럼 나의 중국 유학생활의 외로움과 고생도 완전히는 아니지만 조금씩 씻겨 내려가는 순간이었다. 나를 괴롭히는 사람에게 물총으로 나마 소심한 복수를 해서가 아니라, 나의 고민을 들어주고 해결해주려는 누군가가 내 곁에 생겼다는 게 가장 큰 이유였던 거 같다. 그 후로 그 형과 엄청 친해지게 되었다. 서로 여자 친구가 생기거나 고민이 생기면 서로 먼저 말해주고 힘든 나의 중학교 시절, 중국 유학생활을 기댈 수 했게 해 준 나의 첫 번째 은인이다.


   그 형 덕분에 나의 중학교 중국 유학 생활을 잘 버틸 수 있게 되어 너무 감사하다. 그렇지만 너무 아쉬운 건 내가 고등학생이 되면서 그 형은 중국에서 떠났고 나도 유학하는 도시를 북경으로 바꾸게 되어 연락이 멀어졌다는 점이다. 그 후로 십 년을 넘게 연락이 되지 않다가 최근에 카톡을 주고받게 되었다. 정말 뜻밖에도 2019년 6월 달 나의 생일에 형이 카톡으로 축하 메시지가 왔다. 서로 연락하지 못한 시간이 오래되어 지금은 가장 친한 지인이 아닐지라도 다시 만나면 서로 어릴 적 가장 힘들 때 그 추억이 있으니 너무 소중할 것 같다. 항상 그 형이 잘됐으면 좋겠다. 왜냐하면 내 인생 첫 번째 은인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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