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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엔 Jan 19. 2020

2회 무너진 호그와트, 그리고 몽쉘통통과 박세리

11년 차 유학생의 중국 적응기


2회 -무너진 호그와트와 몽쉘통통 그리고 박세리-          

  “欢迎大家来到无锡00学校"(우시 00 학교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학교 현수막에는 상하이가 아닌 우시라는 한자가 정확히 쓰여 있었고 한국어로도 친절히 우시라고 적혀 있었다. 내가 간 학교의 지역은 상하이가 아니었고 상하이에서 4시간 떨어진 우시라는 곳이 이었다. 쉽게 설명하자면 어떤 외국인이 서울의 끝 쪽인 수유나 미아 쪽에 있는 학교인 줄 알고 갔는데 알고 보니 수원이나 성남이었다는 그런 이야기다. 학교의 모습은 팸플릿과 설명회처럼 정말 대지가 20만 평이되어 보일 정도로 컸고 건물들도 많았다.      

  하지만  딱 거기 까지만 진실이었다. 그거 딱 한 가지! 호그와트와 같을 것이라던 모습은 온데 간데없었고 학교 홍보 팸플릿에 나온 풍경들은 포토샵을 통한 거짓에 가까웠다. 또 기숙사를 최첨단 신식 기숙사라고 자랑했었지만 그저 새로만 지어졌을 뿐 최첨단은 아닌 4인 1실의 일반적인 기숙사였다. 샤워를 할 때면 뜨거운 물이 금방 떨어져 서로 빨리하려고 눈치 게임을 해야 하는 그런 곳...  


  정수기에서는 버튼을 누르면 과일주스가 아닌 시원한 물조차도 용량이 있어 맨 처음 마신 사람만 시원하게 먹을 수 있는 그런 슬픈 진실을 품고 있는 곳이 이었다.  푸른 잔디가 펼쳐진 운동장을 홍보했었지만 군데군데 잔디가 듬성듬성 모습을 보였고 황폐한 운동장이 펼쳐졌다. 또 그곳은 비 만 오면 개구리들이 몰려 운동장 천지에 돌아다녔고 학교 옆에 바로 붙어있는 태호(太湖)라는 호수의 물이 범람해 죽은 물고기들이 운동장에 파닥 거렸는데 난 그 광경을 보고서 정말로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앞으로 이곳에서 기약 없이 살아가야 하는데 앞이 캄캄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고 난 이 사기 같은 사실을 엄마와 아빠에게 전화로 알렸지만 일단 버텨보라며 웃으면서 전화를 끊는 엄마가 신기했다. 며칠이 지나 난 중국어를 배우기 위해 여념이 없었다. 아침 6시 기상해서 줄 맞춰 운동장을 돌고 아침체조와 식사 후 아침 8시부터 저녁 10시까지 이루어지는 타이트한 중국어 수업, 이곳을 언어반이라고 하는데 이곳에서 1년 정도 과정을 이수한 후 정식적으로 중국인 친구들과 수업을 하게 된다. 정말 타이트했고 맨날 숙제가 있었다.


 처음엔 대체 무슨 소리 인지 하나도 몰랐다. 그리고 학교 자체도 평일에는 너무 답답해서 어디론가 나가고 싶었다. 또한 싸이월드 미니홈피가 유행하던 시절, 집에서는 마음대로 하던 컴퓨터를 이곳에서는 2주에 한번 컴퓨터실로 가서 제한된 시간만 하니 정말로 답답했다. 마치 엄청 두꺼운 이불로 날 돌돌 감고만 있는 거 같았다.


  하지만 이러한 답답함에도 주말 외출을 나가게 되면 이 어마어마한 지겨운 상황을 인내해야 하는 반성의 시간이 다가왔다. 어느 날 외출을 나와 KFC에 갔는데 2번 세트가 한국에서 본 징거버거 세트 같아 보였다. 그때는 중국어를 정말 숫자만 말할 수 있는 시기이었기 때문에 영어로 넘버 투를 외치며 햄버거 주문을 했다. 징거버거를 먹을 생각에 한창 들떠 있었지만 돌아온 건 세트 햄버거가 아닌 징거버거가 단품으로 나왔다.


 나는 단번에 의사소통에 문제가 있었다는 걸 확인하고 ‘포테이토 앤 콜라 플리즈’를 외쳤지만 포테이토를 못 알아듣는 직원은 나의 햄버거를 가져가더니 콜라 두 잔을 내게 내밀었다. ‘노노 세트 세트!!!’ 나는 여러 번 세트라고 영어로 이야기했지만 세트를 못 알아듣는 직원은 멀뚱멀뚱 나만 쳐다보았고 나의 차례에서 주문이 밀리자 뒤에서 들리는 핀잔에 너무 창피하고 무서웠다. 절대 그렇지 않겠지만 말이 안 통하는 해외에서 이런 일이 생기니 누군가 나의 햄버거를 집어던지고 나를 KFC에서 쫓아낼 것만 같았다. 결국엔 다른 사람의 도움으로 징거버거 세트를 힘들게 먹었지만 여긴 마음이 찝찝했다.      


  학교 밖으로 나오면 정말 언어의 현실이 나를 반겼기 때문에 수업이 힘들고 못 알아들어도 더 공부해야 했고 숙제도 꼬박꼬박 했다. 학교에서 나를 지도해주신 한국말이 통하시는 조선족 선생님은 나에게 1년 정도면 어느 정도 기초회화를 적응하여 생활이 편해진다고 위로해주셨지만  당시 15세였던 나에겐 1년은 너무 먼 미래였고 당장 한 시간조차 이곳에 있기 싫었다.  


매일 계속되는 중국어는 너무 어려웠고 매일매일 주어지는 숙제와 쪽지 시험이 힘들었다. 또한 시험에서 틀리면 틀린 한자나 문제를 그대로 베껴 쓰는 깜지를 적게는 열 번에서 많게는 수백 번씩 해야 했는데 , 내가 고작 문제 하나 틀렸다고 이런 노동을 해야 한다는 게 너무 불공평하다고 느꼈다. 하지만 나는 그 갇힌 곳에서 쉽게 한국으로 갈 수도 없고 피할 곳도 없어서 마치 나라를 잃은 노예처럼 묵묵히 공부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가장 짜증 나게 했던 건 입맛에 맞지 않는 음식들 이였다. 분명 한국 학생들을 위해 따로 식당이 제공된다고 했는데, 정말 글자 그대로 식당만 따로 제공  제공이 되었을 뿐 나오는 음식은 중국에 처음 온 나와는 맞지 않는 중국 음식들 이였다.


 하루는 이 사기스러운 곳에서 하루하루 근근이 버티고 있었는데, 친구 한 명이 오늘의 메뉴는 치킨이 나온다고 귀띔을 해줬다. 중국에 와서 정말 먹지 못했던 터라 살이 급격하게 빠지고 있었고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먹기만 하면 자꾸 토를 했었다. 그래도 엄마가 한국에서 이곳으로 올 때 가방에 넣어준 몽쉘통통으로 식사를 연명하고 있었다. 그랬기에 전 세계 모두가 좋아하고 어디를 가나 비슷한 맛을 내는 치킨이 나온다는 말에 나는 오전 수업 내내 집중이 되지 않았다. 머릿속에서는 KFC 치킨이랑 코오슬로가 돌아다녔고 엄마가 집에서 튀겨준 치킨이나 비비큐치킨과 머스터드소스의 상상이 나를 충분히 기대하게 했다.


    ‘下课’(수업 끝)이라는 선생님의 소리와 함께 나는 점심시간이 되자마자 식당으로 향했다. 수업받는 장소와 식당의 거리가 어느 정도 되었기 때문에 배는 더욱더 고팠다. 그리곤 기쁨 마음으로 다른 건물 3층에 있는 식당 문을 활짝 열었다.  ‘치킨 먹자 “라는 외침과 함께 식판을 들어 배식 대에 다가갔고 오랜만에 너무 설렜던 것 같다. 하지만 정말 이상하게도... 배식대에는 치킨은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주위를 둘러보고 찾아보아도 치킨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자연스레 귀띔을 해준 친구의 얼굴을 지긋이 쳐다보았고 친구 역시 당황한 기색이 영력 했다. 나는 그래도 치킨을 찾겠다는 희망을 굽히지 않고 식당 직원 분에게 영어로 ‘치킨”이라고 말했고 그 직원은 시선을 지긋이 한쪽으로 돌려 나에게 알려주었다.     


  ‘아아악~~~’ 직원분이 눈길을 준 배식대에는 닭의 머리와 목 부분을 삶아 간장소스로 조린 듯 한 닭대가리가 보였다. ‘하...’ 들고 있던 식판이 흔들렸다. ‘어 이게 아닌데... ’ 속으론 ‘하긴 이것도 치킨이긴 치킨이지 영어로 하면 치킨이니까...’ 라며 마인드 컨트롤을 하려고 했지만 너무 기대를 했던 탓인지 순간 목에서 무언가 잠기는 듯 한 기분이 들었고 난 금방이라도 울 것 같았다...
 

  ‘내가 며칠을 굶었는데. 이게 무슨 치킨이야... 양념치킨은 아니더라도 후라이드 치킨은 나올 것 같았는데...’ 난 순간적으로 눈물이 뚝 하고 떨어지는 걸 알았다. 남들 앞에서는 절대 울지 말라는 아빠의 교육을 받았던 터라 뒤도 돌아보지 않고 식당을 뛰어 전속력으로 뛰어나왔다. 그리곤 있는 힘껏 달려 기숙사로 향했다. 달리면서도 쏟아져 나오는 눈물을 다른 사람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또 배가 너무 고팠기 때문에 빨리 달려서 엄마가 챙겨 준 몽쉘통통을 먹고 싶었다. 기숙사 건물 4층까지 단숨에 올라와 4층 기숙사 대문을 열었고 생각보다 일찍 온 나 때문에 놀란 건지 아니면 나의 빨개진 얼굴에 놀란 건지 잔소리 많던 기숙사 교관은 날 멀뚱멀뚱 쳐다만 보았었다. 나는 교관과 말도 하지 않고 내방으로 들어가 사물함을 열었고 몽쉘통통을 찾아 입에 물었다.

  ‘컥..’  몽쉘통통을 한입 베어 물고 나는 더욱 좌절했다. 왜냐하면 이렇게 맛있는 몽쉘통통이 나에게 남은 건 단 두 개뿐이 이었기 때문이다. 두 개 남은 몽쉘통통, 그동안 중국에 와서 몇 주 동안 뭉쉘통통만 먹었으니 두 개라도 남은 것이 다행이었다. 결국 잠시 멈추었던 눈물이 참을 수 없이  왈칵 쏟아졌다. ‘몽셀 이 2개밖에 없다니... 앞으로 여기서 더 살아야 하고 방학까지 한참이 남았는데 어떡하지...’라는 걱정과 함께 그냥 모든 게 너무 서러웠다. 학교 밥이 맛이 없는 것도 생각이 났고, 학교 설명회랑은 너무 다른 이곳이 싫었다. 아침 여섯 시부터 일어나서 공부하는 것도 너무 힘들었다. 또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하는 것도 너무 답답했고... KFC에 가서 햄버거 세트조차 시키지 못하는 내가 너무나도 싫었다.


꺼억꺼억 거리면서 몽쉘통통을 반만 입에 넣어놓고 목 놓아 울었다. 한입에 다 먹으면 몽쉘이 금방 없어지니까 반만 베어 먹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내가 슬펐던 건  여기서 언제까지 있어야 하는지 모른다는 막연함과 모든 걸 포기하고 돌아가면 또 포기 자가 된다는 그런 압박감이 나를 너무 힘들게 했다. 다른 것보다 그게 가장 힘들었다. 맞다! 여기서 ‘또’ 포기자라고 하는 건... 과거 나의 가장 힘든 기억을 떠올려야 한다.     


  나는 어릴 때부터 꿈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특이하게 항상 ‘골프선수’라고 말했었다. 지금처럼 골프라는 운동이 대중적이지는 않았던 나의 어린 시절, 아빠를 따라 스포츠 뉴스를 항상 챙겨 보았었는데 나처럼 평범한 사람들은 뉴스에서 나오던 타이거 우즈와 박세리가 골프 하는 것을 보는 게 골프를 알 수 있는 전부였던 시절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골프가 그냥 아무 이유 없이 좋았다. 박세리라는 사람이 IMF 시절 꿈과 용기를 준다는 이유로 꿈의 여왕이라서 좋아했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런 인생의 희로애락을 알기엔 난 그때 너무 어린 나이였다. 아무것도 모른 체 그녀가 TV에 나오면 너무 좋았고 기다란 장비로 공을 날리는 게 너무 시원시원해 보였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골프를 하고 싶다고 졸랐던 것 같다.


  하지만 부모님은 너무 격렬하게 반대를 했었다. 아버지는 운동선수 출신의 스포츠 지도자이신데 난 운동신경이 없다고 항상 말씀하셨다. 운동은 취미로 하면 재밌지만 먹고살려고 하려면 정말 힘든 거라고 날 말리셨다. 매일 아빠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공부는 1등 하나 5등 하나 같은 상위권이지만 운동은 금메달이 아니면 아무도 기억하지 않아!!!’ 나중에야 안거지만 내가 어릴 때 달리기를 했었는데 뒤꿈치부터 발을 내닫고 달려서 아버지가 나는 운동신경이 없다고 아셨다고 한다. 어쨌든 아버지와 엄마의 반대가 심했고 또 경제적인 이유도 있었다. 나는 어려서 몰랐지만 골프는 정말 돈이 많이 드는 운동이었다.


  내가 유학을 와서 유학비용이나 골프비용이나 그게 그거 아니냐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우리 집은 내가 태어나고 골프를 하고 싶다고 했던 어릴 적 시절엔 정말 평범한 집이었다. 국가대표 스타플레이어 출신이 아닌 아버지는 운동선수 은퇴 후 평범한 학교 팀의 스포츠 지도자 생활을 하셨고 엄마는 주부였다. 그냥 정말 평범한 집이었다. 그런데 내가 유학을 오기 몇 년 전부터 아버지가 점점 스포츠인으로 커리어를 쌓으시면서 좋은 프로팀으로 영전하셨고 집안의 경제가 좋아지기 시작했다. 어떻게 보면 그때부터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조금 여유롭게 지냈던 거 같다. 그렇다고 집이 엄청난 부자가 된 건 절대 아니다.


  그래도 자식이기는 부모 없다고 했던가? 어릴 때부터 조르고 졸라 우여곡절 끝에 골프를 시작했었다. 그때 초등학교 4학년이었는데 학교가 끝나면 엄마랑 같이 골프장에 가서 레슨을 받았다. 처음에는 밥도 안 먹고 골프만 하는 게 정말 행복했다. 집에서 엄청난 지원은 없었지만 연습용 골프채로 공을 때린다는 게 너무 좋았다. 하지만 점점 강도가 높아지다 보니 너무 힘들었었다.


  갑자기 바뀐 골프 선생님도 너무 무서웠고 앞뒤 안 가리고 혼났었다. 그때만 해도 학교 선생님들의 처벌이 가능할 때였으니 운동을 가리키는 선생님들은 오죽했으랴... 그래서 나는 아빠의 예상을 하나도 벗어나지 않고 골프를 그만두었다. 나중에야 안거지만 바뀐 골프 선생님에게 아빠가 부탁을 했다고 했다. 엄청나게 무섭게 해서 내가 그걸 버틸 근성이 있으면 계속 시키고 아니면 그만두게 하라고 했다는 모종의 거래가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그냥 선생님이 무서웠고 골프가 싫었다. 그렇게 내가 좋아했던 골프를 인생에서 지워버렸다.     

 

  누구는 내가 그런 것을 참지 못해 운동선수로써의 근성이 없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고작 13살인 나에게 매일 때리고 운동장을 쉴틈 없이 돌고 시간 내에 완성하지 못하면 토할 때까지 돌아야 하는 비인간적인 강요와 압박, 그리고 시작부터 끝까지 강압적인 분위가 너무 싫었다. 그리고 가장 싫었던 것은 엄마 아빠가 내가 하고 싶은 걸 응원해주거나 본인들의 의견을 알아듣게 타일러주지 않고 나 몰래 선생님과 그런 말이 오고 가고 그것이 진행이 되었다는 게 난 너무 싫었다. 그렇게 그게 나에겐 상처로 남았던 것 같다. 그냥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게 좋아하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는 걸 어린 나이에 알았고 부모님이 좋아해 주지 않는다는 게 섭섭했었던 거 같다.

      

  그렇다. 나는 그렇게 어린 나이에 이미 하고 싶은 것을 포기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아무리 내가 중국이 싫고 몽쉘통통이 2개밖에 남지 않았어도 여기서 포기하기 싫었다. 그냥 어린 마음에 여기서 또 포기하면 나는 정말 낙오자가 될 것 같았다. 또 유학도 부모님이 일방적으로 보낸 게 아니라 나랑 상의한 끝에 결정했기 때문에 또 조금 힘들다고 포기해 버리면 내가 골프를 안 한다고 했던 그 느낌이 올라오는 것 같았다.      


  몽쉘통통으로 입을 막아 울던 그날 밤, 나는 조용히 방을 나와서 기숙사 끝에 있던  세탁실에서 운동장을 바라보면서 다짐했다. ‘내가 오래는 못 있더라도 여기서 알아들을 정도만, 왜 치킨이 안 나오고 닭대가리가 삶아 나온 건지 이거라도 중국어로 말할 수 있을 정도만 배우고 한국으로 돌아가자’ 이렇게 마음먹었다. 내가 골프로는 포기했지만 여기서 미련하게 버티는 건 해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날부터 하루에 한 번씩 걸려온 엄마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받아야 했을 땐 빨리 끊어버렸다. 엄마가 너무 보고 싶고 한국에 돌아가고 싶었기 때문에 엄마 목소리를 들으면 나는 이곳에서 버티고 살아갈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일부로 가족의 전화를 귀찮은 척했고 단어를 많이 외워야 한다고... 중국인 룸메이트 친구랑 놀아야 한다는 핑계를 둘러대며 일부로 퉁명스럽게 대했다.      


  그렇게 내가 그날 세탁실에서 눈물을 머금고 알게 된 몇 가지 가 있다. 첫 번째, 해외에 나가는 것은 여행으로써만 즐겁다는 것, 두 번째 , 사람이 막에 다다르면 생존 본능이 나온다는 것... 나는 그다음 날부터 두 개 밖에 남지 않은 몽쉘통통을 또 사려고 생각하지도 않았고 입맛이 맞지 않았던 학교 식당의 밥을 우걱우걱 집어넣었다.  

   

  그렇다... 어쩌면 십 년을 넘게 중국에 내가 있을 수 있었던 것은 내가 포기자라는 자격지심이 날 버티게 한 것 같다. 몽쉘통통과 박세리가 한몫했다. 익숙한 것을 내려놓는 법을 알려준 두 개 남은 몽쉘통통, 내가 선택한 것을 또 포기하기 싫었던 마음의 시작인 골프와 박세리... 난 이런 사소한 것이 동력이 돼서 중국에서 지내왔다.


  그 후로도, 현재도 중국에서 지내는 것은 녹녹지 않다. 물론 처음보다 언어의 장벽이나 문화적 괴리감은 없지만 잊을 만하면 시작되는 향수병, 한국에서 지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과 근거 없는 기대감, 타지에서 느끼는 알게 모르게 당하는 이방인 취급 등 수많은 고비와 슬픔이 나를 사로잡는다. 그래도 그때 그 시절 몽쉘통통이 나에게 알려준 것들이 날 지금 2020년 중국에서 목표를 이루어가는 과정까지 있게 해 준 것이 아닐까?     


  그리고 추가하자면 나는 운동을 그만둔 것이 내 인생에서 가장 잘한 결정 중 하나이다. 왜냐하면 난 정말 운동신경이 없는 거 같다. 아니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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