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타임스 죽이기> 감상문

어느 귀인께서 <뉴욕타임스 죽이기>의 감상문을 작성해 보내주셨다. 명문이어서 공유하지 않을 수 없다.


‘뉴욕타임스 죽이기’의 원제는 ‘현실적 악의: 뉴욕타임스 대 설리번 사건에서 민권과 언론의 자유’이다. 원제는 책의 내용을 더 잘 담고 있고, ‘뉴욕타임스 죽이기’는 역자 말처럼 독자의 시선을 더 끈다. 완독한 사람으로서 원제와 역자의 번역을 종합해 책의 내용을 좀 더 풀어서 요약하자면 “설리번이 뉴욕타임스를 죽이려던 게 살리는 꼴이 되어버린 이야기.”이다. 여기서 설리번과 뉴욕타임스 자리에 ‘권력’과 ‘언론’을 집어넣으면 대충 책 전체 의미와 통한다. 그럼 어떻게 뉴욕타임스를 죽이려 했고 어떻게 뉴욕타임스가 살 수 있었는지 설명해보겠다.


권력을 가진 사람은 시민의 비판과 견제가 무섭다. 비판과 견제를 막으려면 비판과 견제를 어렵게 만들어야 한다. 비판과 견제를 어렵게 만들려면 돈이 많이 들게 하면 된다. 돈이 많이 들게 하려면 소송을 걸면 된다. 소송은 지면 큰돈이 들고 이기는 동안에도 큰돈이 드는 일이 기 때문이다. 설리번과 미국 남부의 고위 공직자들은 비판과 견제에 앞장서온 언론을 죽이기 위해 거액의 손해배상을 요구하는 명예훼손 소송 공격을 퍼붓는다. 뉴욕타임스 정도 되는 신 문사가 소송 몇 개로 망하는 게 가능한 일인가 싶지만, 그 당시 미국에서는 그게 가능한 일이 었다. 특히 앨라배마주에서 명예훼손 소송은 원고가 거의 무조건 이기는, 그것도 엄청난 손해 배상금을 받고 이기는 치트키 버그 같은 것이었다. 여기서 앨라배마와 남부의 패착은 그 버그를 남용했다는 것이었다. 게임에서 버그를 너무 많이 쓰면 운영자의 어그로가 끌리듯이 설리번과 앨라배마 공직자들은 연방대법원의 어그로를 끌었고 결국 헌법 패치와 정의구현을 당하게 된다.


20세기 초반 명예훼손 소송 공격이 유행처럼 번졌다. 1946년 밀러드 콜드웰 플로리다 주지사는 이 흐름을 선도했다. 유행은 흑인 민권 운동과 관련이 깊었다. 앨라배마와 미국 남부 주 들은 남북 전쟁에서 패한 뒤에도 인종 분리 정책을 노골적으로 유지해왔다. 그 심각성에 대해 북부 주 언론들이 보도하자 남부 주 공직자들은 북부 신문사들을 상대로 명예훼손 소송 공격을 시작했다. 남부는 북부 언론의 왜곡된 보도가 남부에 대한 선입견을 조장하고 있다고 분노 했다. ‘거짓말쟁이 양키 언론’이 우리 주에 대해 말하게 두지 말자며 들고 일어섰다. 진실은, 당시 남부 주에서 흑인은 정말 길에 서 있어서 백인에게 맞고 학교에 가서 백인에게 맞고 돈이 많아서 백인에게 맞아 죽고 불타 죽고 그랬다. 1950년대 차별에 저항하는 흑인 민권 운 동의 열기가 고조되면서 남부 백인들의 반응도 함께 격앙되었고, 따라서 보도되는 일도 명예 훼손 소송을 거는 일도 많아졌다. 여러모로 운영자의 어그로가 끌리기 좋았다.


북부 언론을 막기 위한 명예훼손 소송이 10여 년 동안 난무하면서 지식인과 법조인들은 이 버그에 대해 충분히 인지하고 고민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마침내 앨라배마주 공공업무 위원 설리번이 소송 공격 유행에 동참해 뉴욕타임스와 미국남부기독교지도자회의(SCLC) 소속 목사들을 상대로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하면서 흑인 민권 운동과 언론 자유화?의 역사는 절정 에 이른다. 설리번 측은 뉴욕타임스가 게재한 모금 광고가 자신의 명예를 훼손했다고 주장했 다. 그 광고는 앨라배마주 경찰과 남부 주로부터 탄압받은 흑인 학생 시위대와 마틴 루터 킹 목사를 구호하자는 내용의 광고였다. 광고는 흑인 학생들과 킹 목사가 공권력으로부터 받은 부당한 대우를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었지만, 부정확한 내용도 일부 섞여 있어 문제가 되었다. 설리번 측은 ‘오늘부터 앨라배마와 나는 한 몸으로 일체가 된다, 앨라배마에 대한 공 격은 나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한다.’는 식의 비약된 논리를 펼쳤다. 광고 어디에도 설리번이란 단어가 없었지만, 경찰의 대응 방식에 대한 비판이 곧 모든 지시를 내린 공공업무위원 설리번에 대한 비판과 마찬가지라고 억지를 썼다. 설리번 측은 광고 내용에 오류가 있었음을 일부 입증하기는 했다. 하지만 그 오류는 큰 틀에서 보면 매우 사소한 수준이어서 그걸 가지고 트집 잡는 것은 마치 ‘우리의 탄압을 그런 식으로 모독하지 마라. 우리는 다른 방식으로 탄압했 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았다. 불순한 의도로 경찰력이 동원되었다는 큰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고, 당시 남부에서 인종 차별의 수위가 공적으로든 사적으로든 뉴욕타임스가 광고한 것 이상으로 심각한 수준이었음을 고려할 때 광고에 부분적으로 거짓이 있었더라도 그건 매우 핍진한 거짓이었다.


광고 게재에 동의한 SCLC 목사들과(사실 목사들은 광고에 서명한 게 아니라 서명당했다) 광고를 게재한 뉴욕타임스는 앨라배마주 몽고메리 순회법원에서 열린 명예훼손 소송에서 패소했다. 재판이 앨라배마주에서 열렸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당시 앨라배마주를 비롯한 대부분의 주에서 명예훼손법은 원고에게 매우 유리한 법이었다. 원고 설리번은 광고 내용이 거짓이라고 주장하기만 하면 할 일이 끝났지만, 피고 뉴욕타임스는 광고 내용이 진실임을 일일이 다 입증 해야만 책임을 면할 수 있었다. 또 광고의 진술로 원고가 어떤 피해를 입었는지를 구체적으로 증명하지 않아도 진술 자체로 원고의 명예가 이미 훼손되었음이 인정되었다. 그렇게 하는 것 이 그때는 당연한 상식이어서 그 누구도, 뉴욕타임스조차도 그러한 법리에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심지어 광고에 실제로 오류가 있었으니 뉴욕타임스가 패소하지 않는다면 그게 오히려 이치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그래서 뉴욕타임스는 앨라배마주가 아닌, 명예 훼손법이 언론 친화적인 곳에서 재판을 받고자 고군분투했었고 이 재판을 어디서 받느냐 하는 ‘관할권’ 문제가 핵심 쟁점이 되었다.


앨라배마 주법원의 판결이 불순했다고 평가받는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이 그 판결을 꼭 자신들의 손으로 내릴 수 있도록 앨라배마 관할 안에 사건을 두고자 기를 썼기 때문이다. 앨라배마 주법원 재판장 존스는 이 재판을 어떻게든 앨라배마에서 열기 위해 뉴욕타임스를 각양각색으로 억까했다. 뉴욕타임스의 주장을 방해하는 원고 측의 모든 요구를 받아들이고 피고 측의 모든 신청을 기각했다. 심지어 관할권을 주제로 자신이 논문에서 밝혔던 주장과 정반대되는 내용의 판결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내렸다. 그냥 그때 앨라배마 백인들은 인종 차별을 더 하고 싶었다. 앨라배마 주법원은 설리번의 설자도 없는 광고가 설리번을 저격한 것이라고 애써 판단함으로써 자신들의 인종 분리 정책을 존속시키겠노라는 확고한 의지를 드러냈다.


흑인 민권 운동이라는 사회적, 정치적 현실 속에서 이 사건은 연방대법원으로까지 올라간다. 연방대법원은 뉴욕타임스와 목사들의 손을 들어주었다. 연방대법원은 소송에 대한 압박과 두 려움이 진실하고 자유로운 표현을 위축시킨다고 보아 명예 훼손법이 표현의 자유를 보호하는 수정헌법 1조와 충돌한다고 판단하였다. 이 판결에 대해 연방대법원이 ‘정치적 현실’을 고려하여 판결하고 이를 도덕적으로 ‘정당화’하고자 노력했다는 평가가 책에 인용되는데 나는 ‘시대적 요구’가 있었기에 연방대법원이 ‘정당한’ 논리를 밀고 나갈 확신을 얻을 수 있었다고 생각했다. 무르익는 민권 운동의 분위기, 좌시하기 힘들 만큼 소송이 남발되는 상황,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존재감이, 이전부터 명예 훼손법과 표현의 자유에 관해 문제의식을 키워오던 연방 대법원으로 행동 개시에 나설 수 있도록 만들어주었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설리번 사건이 아니었더라도 언젠가는 이런 판결이 이루어졌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좀 나이브해 보인다. 뉴 욕타임스와 마틴 루터 킹 목사가 모두 관련되는 절묘한 우연이 아니었다면 정말 역사가 어떻 게 바뀌었을지 모른다. 옥스 정책을 고수하면서 사건을 연방대법원까지 뱃심 있게 밀고 나간 뉴욕타임스의 결단력과 민권 운동의 아이콘이었던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영향력과 그 둘이 모인 기회를 놓치지 않은 연방대법원의 예리한 감각 중 어느 하나라도 모자랐다면 정의를 새로 세우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연방대법원 판결에 핵심 논리를 제공한 변호사 웩슬러, 킹 목사와 함께 민권 운동에 앞장선 앨버내시를 비롯한 흑인 목사들, 이름 모르게 죽어간 많은 흑인들이 이 위대한 판결의 주인공이고 영웅이다.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역할은 그중에서도 가장 컸다. 솔직히 목사님이 아니었다면 버그 패치는 아예 없었을 것 같다. 정합한 논리가 시대의 정의로 받아들여지려면 결국 사람이 필요하다. 광고에 온갖 MSG를 쳐서 사건을 꼬아 버린 러스턴이 있었기에 이런 역사적인 판결도 내려질 수 있었다는 점 역시 골 당기는 진실이다. 덕분에 나는 인간의 부주의함을 좀 더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뉴욕타임스를 죽이려는 시도는 오히려 뉴욕타임스를 살리고 날개를 달아주었다. ‘뉴욕타임스 대 설리번 판결’로 미국은 ‘현실적 악의’ 규칙을 가지게 되었다. 진술이 거짓임을 입증할 책임 을 원고(공직자)가 지게 되었고, 진술이 거짓이더라도 피고(언론)에게 악의가 있었다거나 피고가 그 진위 여부를 무시했다는 것을 원고가 입증하게 되었다. 마음 놓고 진실을 보도할 수 있 는 환경이 갖추어졌다. 물론 마음 놓는 것의 부작용에 대한 염려와 비판도 있다. 긴장이 너무 없어도 진실과 멀어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권력이 진실을 독차지하게 되는 것보다 진실이 자유롭게 토론되며 살아 ‘숨 쉴’ 수 있는 것이 민주주의 사회에 더 큰 이득이었다. 공직자 개인 입장에서는 조금 불쌍한 감도 있지만 시민의 입장에서는 무척 다행인 일이다.


이 책은 나에게 많은 감상을 주었다. 먼저 ‘뉴욕타임스 죽이기’라는 의역도 ‘현실적 악의’라 는 원제도 이 책의 모든 내용을 담지 못한다. 왜냐하면 역자 말처럼 이 책은 언론 자유에 대한 책이자 민권 운동에 대한 책이기 때문이다. 어떤 제목도 이 책이 주는 감동을 모두 담아내 지 못할 것이다. 흑인 민권 운동에 대해 마틴 루터 킹 목사가 고생이 많으셨다는 것밖에 몰랐던 사람으로서 이 책은 참 많은 공부가 되었다. 책을 읽으면서 법에 관한 것보다 민권 운동에 관한 내용을 더 많이 검색했다. 지루하게 법리를 따지는 책이 아니라 오늘날 미국 사회와 미 국 민주주의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흥미롭게 가르쳐 준 책이었다.


논리 안에서 잘 생각하는 사람도 멋있지만, 논리를 새롭게 만들어 내는 사람은 더 멋있었다. 남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측면을 조명해내는 통찰이기도 하고 자신감이기도 한 무엇이 참 감탄스러웠다. 당연하게 여겨지는 논리를 뒤집고 판도를 바꿀 수 있는 명석함과 배짱이 부러웠다. 나는 좋은 시대에 태어나 지금의 상식과 논리가 본래부터 내 성정인 것처럼 여기면서 지낼 수 있는 것을 다행으로 삼고 있는데, 그 시대에 태어나 시공간을 초월한 세련된 문제의식을 가지 고 그것을 논리로 정치로 행동으로 관철시킬 수 있었다는 것이 참 대단하다고 느꼈다. 그리고 가장 정의롭고 명징한 논리마저도 시대와 상황이 뒷받침되어서 빛을 볼 수 있었기에 누구나 자유롭게 의견을 제시하고 토론할 수 있는 표현의 자유와 설리번 판결의 소중함이 더욱 크게 느껴졌다.


준비서면 작성을 ‘준비’하는 데만 두 달이 걸린 뉴욕타임스 변호사 웩슬러의 글쓰기 태도도 아주 감명 깊었다. 웩슬러는 주제에 관한 모든 것, 즉 모든 책, 논문, 기사, 판례를 읽은 후에 야 연필을 들었다고 한다. 웩슬러처럼 위대한 사람도 글 한 편을 쓰기까지 그토록 많은 노력 을 기울이는데 나는 이 감상문을 고작 며칠 만에 완성하려고 하는 것인지 심보가 참 부끄러웠 다. 글 쓰는 게 내 직업은 아니니 두 달까지는 어렵겠지만 좀 더 책임감 있게 글을 완성하려 는 태도를 길러야겠다고 생각했다.


감사의 글에서 에이미 나흐만의 이름을 보고 머리가 띵했다. 설리번 측 변호사 롤런드 나흐 만의 아내로 추정되는 그녀는 남편의 명성에 흠이 갈 수도 있는 책을 위해 기꺼이 자료를 제 공해주었다. 뉴욕타임스와 흑인 목사들에게 철천지원수이자 은인이기도 한 러스턴과 인종 차별에 앞장선 기독교 보수주의 소아동성애자라는 기괴한 타이틀의 존스 판사까지, 인간이란 참 복잡한 존재이다. 이 책의 번역이 끝난 2025년, 트럼프는 ABC, CNN을 비롯한 레거시 미디어들을 상대로 고 액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전방위적으로 진행하는 미디어 죽이기에 나섰다고 한다. 트럼프가 그러한 행보를 보일 수 있는 건 당연히 이를 지지하는 많은 세력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60 년 전에 ‘뉴욕타임스 대 설리번 판결’로 표현의 자유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배웠음에도 인간이 같은 실수를 반복하려는 이유는 사람이 계속 새로 태어나기 때문이다. 현직 교사로서 이 책을 통해 새삼 느끼게 된 사실은 애들은 새로 태어난다는 것이다. 아이들을 가르칠 때 가끔 내가 알고 있는 것을 기준으로 얘네도 당연히 알고 있겠지 싶어 설명을 무심코 넘기는 경우가 있다. 당연한 사실을 굳이 반복하여 말하는 것에 부끄러움을 느끼고 그런 일을 최대한 피하려고 노력해 온 인생이기에 더욱 그럴 때가 많다. 이제 애들을 가르칠 때는 명약관화하여 새삼 언급하기 화끈거리는 진실들을 꼰대처럼 반복하여줄 필요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애들은 이제 막 태어나서 아직 잘 모르므로 ‘표현의 자유는 소중하다’와 같이 좋은 진실들은 매년 앵무새 처럼 말해주는 게 좋겠다.


마지막으로 이 책이 가장 좋았던 점은 번역이다. 특히 문제의 광고인 ‘Heed Their Rising Voices’를 ‘그들의 높아지는 목 소리를 들어라’라고 번역한 것이 백미인데, ‘떠오르는 함성소리에 귀 기울여라’라는 기존 번역 보다 표현은 더 시적이면서 의미 전달은 더 정확하다(모순된 말 같지만 더 시적이면서 더 정확할 수가 있다!) 번역의 이유도 꼼꼼히 밝혀준 점과 번역만으로 전달되기 어려운 배경 지식 들을 일반인 수준에서 친절하게 주석해준 점이 아주 좋았고, 역자들이 이 책에 얼마나 많은 공을 들이며 단어 하나를 두고 고뇌하였는가 짐작할 수 있었다. ‘뉴욕타임스 죽이기’는 나에게 2026년 최고의 책이 되었다. 아직 한 해가 많이 남았지만 이 책을 뛰어넘는 책이 나올 수 있을지 모르겠다. 올해 더는 책을 안 읽을 거 같다는 불길한 선언이라기보다 정말 이 책이 내게 많은 감명을 주고 삶에 실질적인 변화를 주었기에 할 수 있는 말이다. 표현의 자유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다. 오늘도 정치인을, 공무원을, 직장 상사를 열심히 비판하고 있는 우리 모두가 이 책을 꼭 읽어보길 바란다.


감상문을 받아 읽으며 역자의 한 사람으로써 또 한 번 배웠다: 독자가, 역자보다도, 번역된 책을 훨씬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훌륭한 독자는 역자가 놓치고 지나간 내용들을 놓치지 않고 그 의미와 의의를 훨씬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훌륭한 독자는 역자가 그 의미를 과소평가하고 지나간 내용들에도 마땅한 주목을 보낼 수 있다. 감상문의 재치 넘치는 표현들이 이를 잘 보여준다. 번역의 의의는 훌륭한 독자로부터 찾을 수도 있다. 번역의 의의는 번역이 다 끝나고 좋은 독자를 만나고 나서야 비로소 발견되기도 한다. 감상문만으로도 이 책을 번역하기를 참 잘 했다고 느낀다. <뉴욕타임스 죽이기>의 번역은 대성공이다. <모두가 거짓말을 한다>의 저자는 빅데이터 상 독자 중 95%가 책을 끝까지 읽지 않는 것으로 밝혀졌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세상에는 책을 완독하는 독자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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