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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설퍼도 꾸준히 May 11. 2020

비싼 옷, 싼 옷, 좋은 옷

미니멀라이프, 제로웨이스트를 추구하면서 스타일 찾기

한창 김희선이 각종 여주인공으로 활약하고 있던 그때,

그녀가 디자이너 역할을 하던 시절부터였을까.


옷이 참 좋았다.

언니가 사 온 키키 잡지를 닳도록 보고 또 보며

용돈을 받으면 이 옷을 사볼까 저 옷을 사볼까

꿈을 꾸던 시절이 있었다.


쥐꼬리만 한 용돈을 모아서

친구들과 지하상가를 누비다가

옷을 한 벌 샀을 때의 설렘.

교복을 입지 않는 주말이면 그 옷을 주야장천 입었더랬다.

한 겨울에 얇디얇은 간절기 코트를 걸쳐도 전혀 춥지 않았다.




대학생이 되고 당장 과외자리를 구했다.

과외비를 모아 30만 원짜리 나이키 운동화를 샀다.

보기만 해도 미소가 절로 나왔다.

그 신발을 신은 날은 발걸음 하나하나가 조심스러웠다.


'리미티드 에디션'이라면 특히나 더 눈독을 들이고 과외비를 쏟아부었다.

지금의 남편인 당시 남자 친구와

이런 면에서는 뜻이 맞았다.

우리는 열심히 과외를 했고

열심히 가게에 돈을 퍼다 주었다.


어느 여름날,

운동을 좋아하고 여기저기 쏘다니길 좋아하는 남자 친구가

갑자기 아무 곳도 가고 싶지 않다고 했다.

이유를 물으니 대답이 참 단순했다.

"땀 나."


그러고 보니 남자 친구는 비싼 옷을 입은 날은

유난히 조심스러웠다.

옷에 땀이라도 한 방울 흐를까,

밥 먹다 고춧가루 한 점이라도 묻을까,

그야말로 옷을 모시고 다녔다.

특히 하얀 옷을 입은 날은 사람이 아니라 마네킹 같았다.

옷에 주름이 가면 안 된다고 했다.


뭔가 이상했다.

옷은 입으라고 있는 것인데, 옷을 모시고 다녔다.

신발은 신으라고 있는 것인데, 신발을 모시고 다녔다.

어쩌다 비싼 가방이라도 든 날이면

가방에 흠이라도 날까 가방을 하루 종일 들고 다녔다.

바닥에 두면 가방 바닥이 닳을까 걱정이었다.


무언가가 잘못되고 있었다.




그 날 이후로 몇 번의 방황은 있었지만

우리는 비싼 옷에서 싼 옷으로 노선을 바꿨다.

싼 옷을 사니 일단 마음이 편했다.

옷을 입고 땀을 흘리건, 국물이 튀건 전혀 개의치 않았다.


게다가 싸고 예쁜 옷이 참 많았다.

자연스럽게 나는 '핫딜'에 푹 빠졌다.

언제, 어디서 폭탄세일을 할지 알 수 없기에,

틈만 나면 핸드폰을 들여다보았다.

지금이 아니면 그 옷을 그가격에 살 수 없을 것 같아 초조했다.


그때부터는 만 원짜리 옷들을 부지런히 샀다.

만원이면 겨울 외투가 아닌 이상 거의 모든 옷을 살 수 있었다.

겨울 옷도 5만원을 넘기는 것이 거의 없었다.

조금만 부지런하면 노마진이라는 말에 진정성을 느낄만큼

싼 가격에 옷을 살 수 있었다.

비싼 옷을 살 때와 또 다른 재미였다.


옷은 사도 사도 끝이 없었다.

내가 갖지 못한 색깔이, 소재가, 디자인이 넘쳐났다.

보는 눈이 많은 직업인이라는 때깔 좋은 변명도 있었다.


남자 친구가 남편이 되어 신혼집을 마련하고

제일 수납을 신경 쓴 곳이 옷방이었다.

옷방에 최대한 많은 옷을 잘 정리해서 넣었다.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더 많이 옷을 넣을까

있는 창의성, 없는 창의성을 다 동원했다.

정리에 관한 책을 들여다보기 시작한 것도 이쯤이었다.

-물론 옷을 버리라는 부분은 있어도 못본척 했다.-


시작할 때에는 나름대로 여유 있었던 옷방이

3년만에 창고처럼 변했다.

더 이상 넣을 곳이 없어 두꺼운 니트들은 옷장 밖에 차곡차곡 쌓아두었다.

행거를 늘릴대로 늘려

옷방에는 꽃게처럼 옆으로 걸어야만  들어갈 수 있었다.

행거에 걸어둔 옷들은 숨을 쉬지 못했다.

옷방에서는 내 가슴도 숨을 잘 쉬지 못했다.




코로나를 계기로 미니멀라이프와 제로웨이스트에 대해 각성하면서

집을 정리했다.

정리 대상 일순위는 당연하게도 옷방이었다.

몇 년간 싼 값에 열심히 퍼다 나른 옷들을 백 벌 이상 기부했다.

아쉬울 것 같았지만 생각보다 마음이 후련했다.


작은 옷, 나에게 안 어울리는 옷, 소재가 별로인 옷 등

진작 퇴출되었어야 할 옷들이 계속 나왔다.

남편 역시 색깔과 길이만 다른 티셔츠와 바지가 나오고 또 나왔다.

그는 소녀시대도 울고 갈 무지개빛 바지들을 꺼내며

본인의 취향을 의심했다.


옷을 정리하는 며칠의

고민과 고뇌와 먼지 속에서의 노동을 하면서

머릿속에 한 가지 기준이 생겼다.


'입었을 때 기분 좋은 옷만 남기자.'


가격이 비싸서,

유행이라서,

나에게 없는 디자인이라서 산 옷들은

내놓았다.


이런 옷들은 막상 입는 날도 별로 없거니와,

혹 입었더라도 그다지 기쁘지 않았다.

비싸거나, 유행이거나, 새로운 디자인의 옷들도

내게 어울리지 않으면 말짱 꽝이었다.


나는 비싼 옷에서 싼 옷으로,

싼 옷에서 내게 좋은 옷으로 노선을 바꿨다.


전형적인(이제 점점 배가 나오고 있으니 아닌가?)

하체비만에 상체가 길쭉한 나는

되도록 허리라인은 위쪽에 잡혀있고

다리라인으로 갈수록 넉넉한 디자인의 옷이 어울린다.

귀차니즘의 대명사인 나는

주름이 잘 가는 소재보다는 주름이 가지 않는 옷이 좋다.

많이 움직여야만 하는 나는

각 잡혀 멋있지만 불편한 옷보다는

내 몸이 편안한 옷에 손이 간다.


여기에 제로웨이스트를 추구하기로 한 나는

앞으로 새 옷(!)을 들이게 된다면

환경에 조금은 덜 해가 되는 옷이면 좋겠다.


미니멀라이프, 제로웨이스트를 추구하게 되면

자신만의 스타일이 정립된다는 말이 있다.

신기하게도 나 역시 옷 정리를 하면서

나만의 스타일을 찾았다.


 나를 기분 좋게 하는 스타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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