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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설퍼도 꾸준히 May 12. 2020

강제로 미니멀

이렇게 급하게 할 생각은 아니었는데요.

집에서부터 천천히 시작하고 싶었다.

급하게 먹는 밥이 체한다고 했다.

나는 한 번에 완벽하게 하기보다는

내킬 때 조금씩 하는 게 좋다.


하지만 나는 예기치 않게

급작스런 미니멀리즘을 추구하게 되었다.


코로나 덕분인지 몇 년 만에 봄 공기를

미세먼지 없이 마실 수 있는 요즘,

나는 내 직장이 있는 건물로 들어갈 때면

KF94 마스크를 더욱 꼭 조인다.

코로나 때문이기도 하지만,

직장에 앉아있자면

사막의 모래폭풍 한가운데 있는 기분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드르르르륵.

하루 종일 두뇌를 관통하는 공사 소리가 온 건물에서 울린다.

사건은 작년, 아직 내가 이 곳으로 오기 전에 일어났다.


지난해, 이 건물은 지진 안전검사를 했고,

그 결과 무려 4등급을 받았다.

4등급이면 어느 정도냐고 물으니

당장 건물을 부숴도 좋은 등급이란다.


하지만 건물은 살아남았고,

앞으로도 살아남기 위해

지금은 보강공사 중.


건물이 먼지를 뭉쳐놓은 것 같은 회색빛 천으로 휘휘 둘러싸이고,

창문이란 창문은 먼지를 막고자 비닐을 휘휘 둘렀다.


하지만 낡은 건물 틈 사이로 파고드는

공사 먼지는 속수무책이었다.


요즘 매일 아침은 걸레질로 시작된다.

이런 곳도 걸레질을 하나 싶을 정도로

구석구석 열과 성을 다해 걸레질을 하지만

하루 만에 닦는 걸레에는 언제나 먼지가 그득하다.


빨간 벽돌이 열심히 갈린 다음날은 걸레가 빨갛게,

벽돌 사이사이를 긁은 날은 걸레가 까맣게 물들었다.


그리고 나는 강제로 미니멀리스트가 되었다.


먼지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고자

내 자리에 있던 물건들을 정리하고 선별했다.

그다지 쓰임이 없다고 판단되면 집으로,

가끔씩 쓰이는 물건이라면 서랍에 넣었다.

자질구레한 물품들의 먼지까지 하나하나 닦는 노력을 들이고 싶지 않았다.


제일 먼저 컵과 칫솔, 전기포트를 치웠다.

입에 닿는 물건에 먼지를 입힐 수 없었으니까.

잊지 말고 점심 전에 체온을 재라는 지침 때문에

꺼내 두었던 체온계도 서랍에 넣었다.

잊지 말자고 붙여두었던 쪽지들도 다 떼어냈다.

비 오는 날 가져왔다가 퇴근할 때 두고 간 우산들도 집으로 돌아왔다.


이제는 걸레가 지나가는 자리에 걸리는 물건은

모니터 두 대, 스피커와 마우스, 마우스패드, 프린터기, 전화기,

그리고 아직도 고민 중인 약간의 잡동사니가 전부다.

이것들을 어떻게 더 치울 것인가 내일의 나는 고민할 것이다.

스피커도 서랍에 넣고 쓸 수 있을까?

모니터가 정말 두 대나 필요한 건가?


미니멀을 먼저 실천한 사람들의 말처럼

정말로 내게 없어서는 안 될 것들은 사실 얼마 되지 않았다.

나는 직장에서 정말 필요한 것들이 무엇인지,

하루하루 더 날카로운 기준으로 물건들을 판별하고 있다.


나에게 꼭 필요한 본질적인 것들은 얼마 되지 않았다.

때아닌 공사가 나를 본질로 몰아가고 있다.



이미지 출처

EBS_사회_0012, 한국교육방송공사 (저작물 40455 건), 공유마당, CC B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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