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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설퍼도 꾸준히 May 08. 2020

도전! 고기를 사자

쓸데없이 소심한 고기 구매 도전기

나와 남편은 고기를 참 사랑한다.

     

그런데 제로웨이스트를 공부하다 보니

고기 사랑에는 용기가 필요했다.

     

고기는 항상 잘 손질되어 스티로폼과 랩에 칭칭 감겨있다.

고기를 사면 스티로폼과 랩을 함께 사야만 하는 것이다.

제로웨이스트적으로(?) 고기를 사려면

준비물이 필요하다.

장바구니를 챙기는 것은 물론이요,

고기 담을 통을 준비해야만 한다.

     

커피를 텀블러에 사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고기를 자기 통에 담아 사는 것은

생각보다 생소하고 어색한 일이다.

     

정육점에서 포장되지 않은 고기를 잘라달라고 한 뒤,

본인이 챙겨 온 통을 꺼내 저울에 올리고 0점을 맞춘다.

그리고 그 통에 다시 고기를 담아 무게를 재고

가격표를 받아 고기를 사는 것,

즉, 쓰레기 없이 고기를 사는 것은 생각보다 절차가 많다.


이런 이유로 마트에서 포장되지 않은 고기 사기는

몇 번이나 실천 목록에서 뒤로 밀려나고 말았다.

     

완벽한 환경보호자보다는

어설픈, 그러나 노력하는 환경옹호자가 되자는 나의 결심이

이때만큼은 좋은 핑곗거리가 되었다.

완벽할 필요가 없다. 고기는 그냥 사자.

     

하지만 결국 스티로폼을 구매하는 것에 대한

불편한 마음이 이기는 날이 오고야 말았다.

오리고기 1kg 한 팩이 몇 겹의 랩에 쌓여있었던 것이다.

왜인지 모르겠으나

오리고기의 살과 뼈가 나뉘어 포장되어 있었고,

둘을 구분하면서 다른 때보다 훨씬 많은 랩을

벗기고 또 벗겨야만 했다.

     

다음 장보는 날 나는 가방에 ‘고기 통’을 챙겨 나왔다.

가방은 무겁고 마음은 복잡했다.

     

정육점에서 싫어하면 어쩌나,

혹은 좋은 일 한다고 좋아해 주시려나,

사람이 많이 있는 경우는 어쩌나,

내가 무슨 부귀를 얻자고 나도, 사장님도 번거롭게 만드나,

오만 생각들이 머릿속을 휘저었다.

     

정육점 앞에서 잠시 숨 고르기를 했다.

가방에서 주섬주섬 통을 꺼내면서

도망가려는 용기를 그러모았다.

     

“여기에 앞다릿살 찌개용 400그람 주실 수 있으세요?”

     

당당하고 싶었으나 목소리가 어째 기어들어갔다.

     

정육점 아저씨는 다행히 귀찮은 얼굴은 아니다.

조금은 용기가 났다.

     

아저씨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포장된 고기를 냉장고에서 꺼낸다.

이거 드리면 되냐는 아저씨의 물음에

나는 다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한다.

     

“쓰레기 안 가져가려고요. 새로 썰어서 요기에 담아 주실 수 있으세요?”

일부러 선한 웃음을 지어 보인다.

아저씨도 친절하게 다시 말씀하신다.

포장을 뜯어 담아가란다.

     

“아니요, 일회용품을 쓰고 싶지 않아서요.”

나는 다시 미소 지으며 말한다.

     

이번에는 아저씨가 난색을 표한다.

그러려면 커다란 고기를 다시 다 썰어야 한단다.

용기가 팍 사그라들었다.

고작 오천 원어치 고기를 사면서

커다란 덩이를 썰어달라기에는

아직 내게는 뻔뻔함이 부족했다.

     

씁쓸하게 포장된 고기를 들고 나오면서

다음에 어찌 고기를 달라고 할까 고민에 빠졌다.

     

일단 동네 고깃집을 두루 다녀봐야겠다.

이 많은 고깃집 중 한 곳을 못 찾으랴.

     

이렇게 생각하니 성급하게 스티로폼과 랩을 구매해버린 것이 후회스럽다.

     

그래도, 나 같은 사람이 많아지면

고깃집 사장님도 포장 없는 고기를 팔아볼까

생각하시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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