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어설퍼도 꾸준히 May 19. 2020

뻘짓의 역사 1

뻘짓은 돌아오는 거야!

뻘-짓
아무런 쓸모없이 헛되게 하는 짓
출처 : 다음 어학사전


스무 살, 드디어 자유(혹은 방종)를 내 손에 거머쥔 뒤,

자율적인 뻘짓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내가 저지른 무수한 뻘짓들 중 

거대 뻘짓 두 가지의 역사를 짚어보려고 한다.




때는 스무 살 여름.

지금의 남편인 남자 친구를 아직 내가 좇아 다니던 그 시절.

그가 말한다.

"우리 학교 너무 재미없지 않냐?"

그가 하는 말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쑨대도 곧이들을 때라

격하게 동의했다.

실은 반수를 거쳐 새로 들어간 대학교는

그 말고는 (콩깍지를 제대로 낀 내 눈에 그는 말 그대로 빛이 났다!)

별 재미를 느끼지 못하던 터였다.


그와 나는 머지않아 길고 긴 휴학의 길을 걷는다.


꿈은 크게 가지라고 했던가.

우리는 재미라고는 눈 씻고 찾아도 찾을 수 없는

대학교를 탈출하기로 마음먹었다.

목표는 서울대, 그중에서도 수의대였다.

딱히 수의대에 가고 싶었던 것은 아니다.

단지 그가 수의대에 가서

이런저런 사업을 하면 좋을 거라는 말에

홀라당 넘어갔을 뿐이다.


아, 얼마나 철없는 시절이었나.


물론 원대한 목표를 갖는 것과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은

철저히 다른 일이다.


서울대 수의대를 내걸고 휴학을 했으나

우리 둘은 도서관에 가방만 올려두고

세상을 쏘다녔다.

누군가 그 시절 무엇을 했느냐 물어오면

번지르한 대답 하나 할 수 없는 시절이다.


그와 나는 둘 다 스스로 학자금을 내고,

용돈을 벌어 다니는 처지였으므로

학교를 휴학하고서도 열심히 과외를 뛰었고,

착실히 들어온 과외비는 홀랑홀랑 잘도 까먹었다.


과외비를 열심히 모아서

대학생이라면 누구나 거쳐가는 것만 같은

유럽 배낭여행 한 번 가지 않고,

맛있는 음식과 갖고 싶은 옷에 홀라당 써버렸다.

그저 동네 삼겹살집에 가서 고기를 구워 먹고,

옷을 몇 벌 사고 나면

다시 과외비 받기를 학수고대했다.


우리가 서울대 근처도 갈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그는 더 이상 미룰 수 없을 때

-더 이상의 휴학이 불가능할 때-

군인이 되었다.


남겨진 나는

수의대를 꿈꾸다가 다시 학교로 복학할 수는 없다는

알량한 자존심으로

행정고시를 보겠다고 집에 들어앉았다.




그냥 대학교를 졸업하는 게 어떻겠느냐는 부모님 앞에서

눈물바람을 하며

이대로 졸업할 수 없다고

죽어도 행시를 보겠다고 다짐을 했어도

행시를 위해 노력하는 것

행시를 목표로 잡은 것과는 다른 일이었다.


모아둔 과외비 한푼 없었으므로

돈도 아끼고 시간도 절약하겠다는 생각으로

모든 것을 집에서 해결하기로 했다.


물건을 탑처럼 쌓아두기만 하던 책상을 치우고

PMP(잠시 등장했다 사라진 동영상 플레이어)로 강의를 들었다.

가만 앉아서 강의를 듣고 있노라면

내 머리가 자유롭게 춤을 추었다.

위-아래. 위-위 아래.


내 전공과는 요만큼도 겹치는 부분이 없는

-물론 내 대학생활을 돌이켜보면

전공과 겹쳤다 하더라도 그리 큰 도움은 되지 않았을 것이다-

경제학, 정치학, 행정학, 행정법을 듣고 있자면

두껍고 끝없는 책들이,

강사들의 이래 가지고 되겠느냐는 질책이

마음에 돌처럼 들어앉았다.


행시를 보겠다고 질질 짰던 것이 부끄러워

차마 마음대로 놀지도 못하고

책상에 망부석처럼 붙어 있으려니

몸도 마음도 점점 생기를 잃어만 갔다.


휴학 3년, 행시 1년.

도합 4년의 길었던 뻘짓을 접기로 했다.

알량한 자존심을 접었다.




뻘짓이 단순히 시간 낭비만은 아니었다.

뻘짓이 내게 몇 가지 남긴 것이 있다.


1. 뻘짓은 내게 '나는 엄청나게 타율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알려줬다.


졸업 무렵 치러야 했던 시험을 위해서

스터디를 꾸리고 매일같이 학교 도서관을 다녔다.

공부 내용을 점검하는 공부 스터디,

도서관 출석 시간을 체크하는 생활스터디,

같이 점심을 먹으며 막간 퀴즈를 내는 퀴즈 스터디.

스스로 스터디의 노예가 되었다.


토요일에는 꾸역꾸역 노량진을 다녔다.

노량진으로 왔다 갔다 하는 시간이 아까웠지만

인강으로는 또다시 내가 위-아래로 춤을 출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에 흔들리지 않았다.


나 스스로 해야 하는 것에 되도록 내 의지 이외의 장치를 마련해 둔 것은

정말로 잘한 일이었다.


2. 엉덩이를 무겁게 만들어줬다.


맛보기 수준이었지만 행시를 공부해본 경험은

내 엉덩이를 도서관 의자에  

있는 힘껏 붙잡아 주었다.


꼬박 일 년 동안 도서관에서 살았던 경험이

쉬웠던 것은 아니나,

행시를 생각하면서 이 정도는 껌이라며

주문을 외웠다.


그리고 그 주문은 효과가 좋았다.


(옆에서 온갖 한풀이를 다 받느라 고생한 지금의 남편에게

심심한 사과의 말씀을 올리는 바이다.

어쩌면 목표했던 시험에 무사히 통과한 것은

그가 내 화받이 역할(?)을 충실히 해준 덕분일지도.)


3. 목표를 세우고 이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철저히 별개라는 것을 뻘짓이 긴긴 시간 일깨워주었다.


수의대를 가겠다고,

행정고시를 보겠다고 설쳐대고

그에 걸맞은 노력을 하지 않는 것은

정말 괴로운 일이다.


놀아도 즐겁지 않다.

그렇다고 공부하고 싶지도 않다.

정말 어중간하고 찜찜한 마음으로 보냈던 시간들이

얼마만큼 괴로운가에 대한 기억이

아직도 괴롭도록 선명하다.


덕분에 이제는 너무 큰 목표를 세웠을 때

그것이 터무니없다는 것도 인정할 줄 알고,

일단 하고자 했다면 노력해야 한다는 것도 잘 안다.


무엇보다

성실하다는 것이 얼마만큼 위대한 것인지

아주 잘 알게 되었다.


4. 마지막으로 뻘짓 덕분에 나의 중심을 찾았다.


4년이나 뻘짓을 한 덕분에

남아도는 시간이 많았던 나와 남편은

온갖 쓸데없는 것에 관해 대화를 나눴더랬다.


시답지 않은 대화들 속에서

가끔은 인생에 대해, 소중한 가치에 대해

진지하게 대화를 나눴다.

그와의 대화 속에서

나의 중심이 가슴 한가운데 묵직하게 자리 잡았다.

바람이 나를 거칠게 흔들어도

꿋꿋이 버틸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내가 무엇을 소중히 여겨야 하는가에 대해

뻘짓을 하는 동안

몸으로, 머리로 경험했으니까.




부모님의 시선으로 보자면

어차피 대학교 졸업하고 정해진 길을 갈 것이었다면

4년을 돌아올 필요 없이

일찍 졸업하고 일찍 돈을 벌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지금 남편과 내가 소원하는 드림하우스를

이미 갖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아쉬움도 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간의 뻘짓이 있었기에

더 깊어질 수 있었다.

뻘짓이 나를 나로 만들었다.

마냥 즐겁지만은 않았던 시간이지만

그 시간은 그 시간만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내 두 번째 뻘짓은 결혼 후 일어났다.

To be continued...

 


이미지 출처

EBS_교육_0022, 한국교육방송공사 (저작물 40455 건), 공유마당, CC BY

매거진의 이전글 행복은 선택할 수 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