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어설퍼도 꾸준히 Jun 03. 2020

스타벅스에서 원두 찌꺼기를 얻어왔다.

원두 찌꺼기는 쓰레기가 아닙니다. 

스타벅스 마니아는 아니다.

주변 커피집을 골고루 다니는 편이다.

음악 듣는 것을 정말 좋아하지만

아무리 좋아하는 노래라도 

같은 노래를 연속해서 듣는 것은 싫어한다.

커피도 좋아하지만

같은 커피를 매일 마시는 것은 싫어한다.

싫증을 잘 내는 타입이다.


그날따라 스타벅스가 당겼다.

오랜만에 스벅에 들러 오늘은 뭘 마셔볼까 한참을 고민한다.

아메리카노는 깔끔하고 라테는 부드럽다.

마키아또나 모카는 당 충전에 그만이다.

새로 나온 신상들의 맛은 어떨지 궁금하다.


"따뜻한 카푸치노, 작은 걸로 주세요."

주문하면서도 다른 커피를 고를 걸 그랬나 아쉬워하는 와중에

돌아오는 대답이 황당하다.


"현재 저희 매장에서는 코로나-19 감염 예방을 위해

모든 음료를 일회용 컵에 제공하고 있습니다.

텀블러 할인은 유지되오니 일회용 컵에 담아 가시겠습니까?"


이게 무슨 말이지?

코로나-19 감염 예방을 위해서

내 텀블러를 받아주는 게 더 좋은 게 아닌가?

직원에게 다시 텀블러에 담아달라고 말해볼까?


서둘러 출근을 해야 하는 아침 시간,

내 뒤에는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고, 마음이 급하다.

어버버 하면서 카드를 내밀어버렸다.


스타벅스를 나서는 내 손에는

텅 빈 텀블러와 일회용 커피잔에 담긴 카푸치노가 들려있었다.


왜, 왜, 도대체 왜 그냥 나오지 못하고

일회용 컵에 커피를 받아와 버린 걸까.


하루 종일 마음이 찜찜했다.

한동안 스타벅스에 발길을 끊었다.

스타벅스 말고도 내게 커피를 제공해 줄 곳은 많으니까.




스벅에서 발길을 끊은 지 한 달 즈음.


직장에서 우연히 얻어마신 그곳의 라테 한 잔,

라테가 이렇게 고소할 수 있나?


스타벅스를 고집하는 사람은 아니었는데,

스타벅스 커피가 특별히 맛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었는데,

그날 마신 라테가 며칠을 입에서 맴돌았다.


며칠의 망설임 끝에 평소보다 약간 일찍 집을 나섰다.

원래 가던 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스타벅스 매장에 가기 위해서다.


이 매장에서도 텀블러를 안 받아주면

이번에는 기필코 그냥 나오리라 다짐을 하고

떨리는 마음으로 텀블러를 내밀었다.


"따뜻한 라테, 작은 걸로 주세요."

자주 가지 않다 보니 아직도 사이즈 이름이 헷갈린다.

다음에는 '숏이요!'라고 당당하게 외치리.


"숏 사이즈, 맞으시죠?"

직원이 뚜껑은 열어달라며 텀블러를 받아간다.

오예! 

이게 뭐라고 긴장이 풀리면서 기분이 좋다.




라테를 기다리며 매장을 둘러보았다.

조명 아래 반짝이는 새 텀블러들이 올려진 

진열대 앞에서 한참 침을 흘렸다.


내가 가지고 있는 텀블러는 용량이 너무 적어서,

아이스를 시키기에는 부담스럽다.

이제 곧 여름인데, 아이스의 계절인데!

얼마 전 엄마 집에서 얻어온 리유저블 컵은

용량은 넉넉하지만 유리라 덜렁이인 내가 깨 먹을지도 모른다.

새 텀블러는 예쁘고 용량도 크다.

나를 합리화할 합당한(혹은 합당해 보이는) 이유가 줄줄줄 나왔다.

저절로 신상에 손이 갔다.


잠깐!

듣고 싶지 않은 내면의 소리가 들린다.


<녹색시민 구보씨의 하루>

를 읽었던 것을 잊어버린 것은 아니겠지?

구보씨가 사용하던 많은 제품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구보씨의 손에 들어왔는지 기억하고 있잖아!


광산에서 스테인리스 원석을 캐고

공장에서 원석을 가공하고 텀블러를 생산해서

여기까지 오기까지의 과정들.

그 과정을 기억하고 있다면 멀쩡한 텀블러를 놔두고

또 사는 일 따위 하지 않을 거야. 암.


내 것이 아닌 듯한 내면의 소리가 제법 시끄럽다.

매우 매우 듣기 싫다.


스스로가 유난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자꾸만 울창한 산을 파헤쳐 만든 광산,

광산에서 흘러나온 오염물질에 오염된 강이며,

공장에서 사용한 전기와 굴뚝에서 나왔을 미세먼지,

여기까지 운반되며 내뿜었을 이산화탄소가 떠오른다.

슬프고도 힘겹게 새 텀블러를 들었다 놓았다.


텀블러가 망가지면 사자.

아직 내 손에는 튼튼한 텀블러와

용량이 넉넉한 리유저블 컵이 있어.


잠시, 책을 읽은 내가 원망스럽다.


자꾸만 빛나는 텀블러가 나를 부르는 것만 같아

매장의 다른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곳에 가지런히 정리된 커피 찌꺼기가 놓여있었다.

가져가기도 좋게 종이봉투에 포장되어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원두 찌꺼기가 필요한 참이었다.

텀블러에 대한 보상심리가 작용한 것인지도 몰랐다.


조만간 시험해볼 소프넛 설거지에

원두가루를 함께하면 기름기가 쏙 빠진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원두가루만 있으면 천하무적일 것만 같다.


어쨌든, 나에게는 원두 찌꺼기가 꼭 필요했다!


약간은 축축하고 묵직한 원두 한 봉지를 가방에 넣었다.

두둑해진 가방에 기분이 좋다.

얼른 퇴근하고 원두를 만나보고 싶어

하루 종일 가방을 들여다보았다.


제법 묵직한 원두 찌꺼기. 봉투에 활용방법도 상세히 쓰여있다.





집에 가자마자 신문지를 펴고 원두를 널었다.

원두를 축축한 상태로 보관하면

곰팡이가 번식해 활용할 수 없다.


해가 좋은 날 신문지와 함께하면 원두가 금세 보슬보슬 마른다는데,

하필 우중충하고 금방이라도 비가 올 것 같은 날이다.

핑곗김에 보일러를 틀었다.


신문지를 깔고 그 위에 원두를 부었다.

생각보다 양이 많다.

뭉친 원두 가루를 손으로 뭉개 풀어준다.

손이 금방 새카맣게 변했다.

신문지 밖으로 원두가루가 흘러나간다.

그제야 미니멀 라이프 카페에 올라온

택배박스에 원두가루를 말리면 좋다던 글에

천재라는 댓글이 주르륵 달린 이유를 이해한다.


다음에 말릴 때는 한꺼번에 다 펴지 말고 두, 세 군데로 나눠서 말리리. 


흘린 가루를 조심해서 치우고

손을 씻었다.

손에서 아직까지 커피 향이 난다.


저녁을 먹고 남편과 동네 산책을 다녀왔다.

집안에 온통 커피 냄새가 가득하다.

다만, 향긋하기보다는 좀 묵은 냄새다.

잘 마르면 더 나으려나.


원두의 상태를 확인해보니

벌써 위쪽은 잘 말라 색이 연해졌다.

안쪽에 아직 축축하고 까만 원두가 보인다.


호모 사피엔스라면 도구를 사용할 줄 아는 게 맞다.

이번에는 숟가락을 가지고와 원두를 뒤적인다.

손에 커피가 묻지 않으니 참 편하다.



신문지가 그 사이 축축해졌다.

약해진 신문지가 찢어지는 불상사가 생기지 않도록 조심조심 원두를 섞었다.

신문지를 더 깔걸 그랬다.

이렇게 또 하나, 삶의 지혜를 배운다.


내일은 원두가루 성능도 시험해볼 겸,

삼겹살 파티다.

삼겹살이, 아니 원두의 기름 빼는 실력이 몹시도 기대된다.



매거진의 이전글 탈샴푸 도전! 소프넛으로 머리감기 2일차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