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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설퍼도 꾸준히 Jun 10. 2020

스타벅스 원두로 기름 닦기

춘장이 된 원두에 기뻐하다가 저처럼 실수하지 마세요.

일주일쯤 전, 스타벅스에서 원두찌꺼기를 얻어왔다. 

https://brunch.co.kr/@ksy870223/75


원두를 거실에 널어두고 뒤적여가며 3일을 말렸다.

하필 날이 덥고 습해 

날이 좋으면 반나절이면 된다던 원두 말리기가

3일이나 걸렸다.


요령이 없어 거실에 커피가루를 휘날리며 얻은 2리터의 원두가루. 안 쓰는 플라스틱 통이 총출동했다.

원두가루가 완성되고, 

원두를 핑계 삼아 삼겹살을 사 왔다. 

이번에는 마트가 아닌 동네 정육점으로 가서

당당히 유리통에 삼겹살 사기 성공!

(이 날은 어떤 쓰레기도 없이 장보기에 성공했다! 뿌듯하기 그지없는 날이다!)


기름진 삼겹살 몇 덩이를 넣어 

보글보글 고기 맛 나는 된장찌개를 끓이고 

노점 할머니께 산 상추와 깻잎을 씻고

고소한 삼겹살을 구웠다. 

미니멀 카페에서 배운 부추무침도 뚝딱 해서

삼겹살과 곁들이니 이곳이 바로 천국이었다.

(미니멀 카페에서는 집 정리와 더불어 어떻게 하면 

살림을 미니멀하게 할까를 궁리하는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이라, 엄청난 살림의 꿀팁들이 총망라되어있다.)

배도 두둑이 채웠겠다,

먹은 그릇을 싱크대에 모았다.

그리고 누런 기름이 진득하게 올라앉은 프라이팬을 후딱 집어 들었다.

아마, 내가 프라이팬 닦기를 이날처럼 기다렸던 적은 처음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삼겹살보다 더 기다렸던(정말?) 원두로 기름 닦기의 결과가 너무나 궁금했던 탓이다.


프라이팬 위의 기름을 원두가루가 열심히 먹고 있다. 기특한 녀석!

밥을 먹는 사이 진득해진 기름 위에 원두가루를 듬뿍 부었다. 

원두를 넉넉히 부었다고 생각했지만, 

기름을 흡수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원두가 필요했고 

나는 프라이팬 위로 원두가루를 세 번이나 더 부어야만 했다.


머릿속으로 상상했을 때에는 원두를 뿌려주기만 하면

몽골몽골 원두가 뭉쳐지면서 

자동으로 원두가 기름을 먹었으나,

현실에서는 원두를 굴려줄 도우미가 필요했다. 

원두에게 자아가 없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설거지통에 들어가 있는 숟가락을 꺼내 원두를 프라이팬 위에서 비볐다.

흡사 자장소스를 비비는 듯한 착각과 함께

원두는 기름을 먹으며 춘장처럼 뭉쳐갔다.


자랑스러운 춘장 아니, '기름원두덩어리'를 음식쓰레기봉투에 쏙 집어넣고는 

기쁜 마음으로 프라이팬에 물을 붓는 순간,

머리를 스치는 한 문장.


싱크대에 원두가루를 버리지 마세요.


어디선가 들었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어딘지 쌔한 느낌과 함께

얼른 수전을 잠그고 인터넷 검색을 했다.

검색어는 싱크대, 원두.

포털 사이트에는 기다렸다는 듯

원두가루로 꽉 막혀버린 싱크대를 뚫는 이야기가 줄줄 나왔다.

수리기사님들이 카페 싱크대를 뚫기 위해 자주 출장을 다니시는 듯했다.


지금 내 프라이팬에는 미처 춘장이 되지 못한 원두들이 

물바다 속에서 헤엄을 치고 있었다.

이놈들도 싱크대에 부어버리면

수리기사님들을 기다리며 하수구에 자리를 잡겠지.


어쩌지?


잠깐의 고민을 거쳐 

설거지통에서 야채를 담는데 썼던 채반을 꺼냈다.

그리고 채반에 키친타월을 한 장 깔았다.

나는 드립 커피를 내리는 마음으로

프라이팬에서 춤추고 있는 '기름원두물'(?)을 내렸다.


다행히 키친타월 위에 원두가루들이 잘 걸러진 채로 

프라이팬에서 물을 버릴 수 있었다.


키친타월을 조심스레 오므려 휴지통에 넣으면서

다음번에는 물을 붓기 전에 반드시 먼저 원두가루를 닦아내리라

다짐했다.

제로웨이스트 고수들이라면 

키친타월 대신 와입스(제로웨이스터들이 휴지 대신 사용하는 천. 손수건, 행주, 식탁 티슈, 키친타월 등등 사용하기 나름이며, 닦고 빨아쓰면 되는 친환경적인 물건이다.)를 썼겠지만

나는 아직 와입스가 없다.

(사실 아직 와입스를 사용하기에는 겁이 난다. 도대체 무엇이?!)


원두가 기름을 열심히 먹어줘서 그런지

설거지는 너무나 쉬웠다.

프라이팬은 설렁설렁 닦아도 뽀득하게 닦였다.


반짝이는 내 사랑 스댕프라이팬

원두가 아니었더라면 키친타월을 몇 장이나 써가며 기름을 닦아내고도

한 번의 거품으로는 기름기가 가시지 않는다며,

두 번, 세 번의 거품칠을 했을 것이다.


원두가루와 키친타월 한 장에 이렇게 뽀득한 프라이팬을 만날 수 있다면 

꽤나 성공적인 방법이라 할 수 있겠다.


총평

삼겹살 기름에는 원두찌꺼기가 최고입니다.

그러나 싱크대에 가루를 버렸다가는

배보다 배꼽이 더 클 수 있으므로 

반드시 물로 헹구기 전, 닦아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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