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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진율 Oct 19. 2022

죽고 싶었는데 암이 제 발로 찾아왔다.

살고 싶어 졌다가 살기 싫어졌다가


몸에 뭔가 이상이 생기면 그 원인이 무엇인가? 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끈질기게 추적 해나가 본다.

이토록 집요하게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본 적이 있나? 싶을 만큼.


처음 병원에 가게 된 건 어느 날 별로 한 일도 없이 몸이 너무 피곤해서였다. 피검사를 했는데 지극히 정상이었고 6개월 뒤 다시 오라고 했다.


6개월 뒤에는 사실 내 몸이 이렇다 할 증상을 못 느꼈는데 갑상선 호르몬 수치가 높게 나왔고 갑상선 저하증 진단을 받았다.

그리고 초음파 검사도 주기적으로 받게 됐는데 어떤 날은 결절이 3개였다가 어떤 날은 8개가 보인다고 했고 그 중 모 양이 이쁘지 않은 결절은 조직검사를 했다.

얇은 주삿바늘을 초음파를 보며 결절에서 조직을 얻는 방법인데 여러 번 주삿바늘로 생살을 찌르기 때문에 아프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다.

검사를 여러 번 받으며 느끼는 것은 아프지 말아야지.. 였다.

그렇게 7년을 능동적 추적관찰을 하다가 세침검사에서 암이 나왔다는 말을 들었다.

암이라는 단어 자체가 주는 중압감과 두려움에 의사랑 무슨 얘기를 했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내손엔 대학병원 진료의뢰서와 조직검사결과지가 들려져 있었고 약국에 가서 약을 처방받으며 남편에게 전화를 하며 꺼이꺼이 울었다.

가끔 약국에 내려와 전화를 하면서 울던 사람을 보았는데 그렇게 울던 사람은 나랑 같은 진단을 받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갑상선암 수술은 전국 평준화되어 있고 의사들 실력도 다들 좋다고 했다. 하지만 세 군데 병원은 가보라는 말을 듣고 병원 투어가 시작됐다. 검사에 검사를  거듭하면서 암이 없는 오른쪽에도 뭔가 보인다고 했고 갔던 병원은 갑상선전 절제를 권유했다.

전신마취가 무서운 게 아니라 이 수술로도 암이란 놈이 끝나지 않을까 봐 걱정이었다. 물론 그건 지금도 진행 중이다.

갑상선암이라고 하면 "그건 암도 아니야~"

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실제 재발률을 모르고 하는 소리다. 또 폐와 뼈로 전이가 잘되는 암 종류도 있다. 그래서 치료도 힘들어지고 생존율도 낮아지는 경우도 있다.


병원에 입원해서 수술 전 부작용에 관한 고지내용을 듣는다.

성대신경 손상으로 인한 성대마비, 쉰 목소리, 저칼슘증, 반회후두신경 손상으로 인한 고음불가..

그래서 음악을 전공하는 분들이나 가수 거나 성악가를 직업으로 꿈으로 가진 사람들은 이 부작용 때문에 걱정이 많을 거란 생각이 든다.

나 또한 수술 후 3개월 이상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문자로만 대화하고 밖에 나갈 엄두를 못 냈다.

커피 한잔 주문하기도 힘들었기 때문이다. 나오지 않는 얇고 쉰 목소리로 상대방에게 반복해서 말하고 나면..

'아.. 정말 이렇게 평생을 살아야 한다면 죽는 게 낫겠다'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나에겐 왜 암이 생겼을까?

유전은 아니다. 식구들 중 나만 그러하기에.

나는 예민하다. 자는 곳만 바뀌어도 잠을 설치고 비리고 냄새나는 음식은 역겨워서 토하기도 한다.

그리고 시어머니와의 갈등과 아니 일방적인 언어폭력과 중간에서 남편이 아닌 아들 노릇만 했던 남편에 대한 스트레스가 컸다.

아직도 시어머니나 남편은 서로를 하나의 인격체로서 독립해야 할 인간이 아닌 운명공동체로 여기고 있다.


예컨대 시어머니는 7동안 애가 없던 손위 형님이 마음이 쓰여서 결혼하자마자 임신한 내게 아이를 낳아서 형님 주고  넌 다시 임신하라며... 말 같지도 않은 얘길 해놓곤 본인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며 아들 앞에서 딱 잡아뗐고..

또 어느 날은 집한칸 없이 사는 아들이 불쌍했는지 "너네 집에서 집 좀 사줄 수 없냐?"고도하셨지만 남편도 시어머니도 언제 그런 말을 했냐? 며 나를 이상한 년으로 몰아갔다.


내 우울증도 이때부터 시작이었다. 아이가 세 살 무렵 됐을 땐 일하러 나가고 싶었는데 아이가 어리다며 남편이 만류했다. 다살이 되었다. 그래도 엄마가 필요하다며 초등학교에 들어갈 때까지만 있어 보라 했다.

그 사이 나는 경단녀가 됐고 어느 날인가는 내가 원해서  맞벌이를 하지 않았다며 나를 몰아세웠다.

진짜 어디 가서 말할 곳이 없었다. 친정엄마는 걱정만 할 테고 친구는 없었다.

속으로 쌓여가는 울분과 분노와 화병이 나에게 암이 찾아온 이유인 것 같다.


목소리를 잃은 채로 살면서 많이 울고 화도 많이 냈다. 화가 나면 나는 대로 휴대폰도 던지고 손에 잡히는 대로 부수고 했다.

그래도 목소리가 안 나올 거라는 절망감을 해소할 순 없었다.

체중이 20kg이 빠졌다.

지방간 때문에 간수치도 오르고 있었고 살고 싶은 이유가 없었다.


오롯이 혼자 감당해야 했다. 누구 하나 내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었고 그 와중에 나는 일어나면 집안일을 하고 있었다. 여자는 아프면 싱크대 앞에서 죽는다더니.

그 말이 딱이다 싶었다.


목소리는 4개월여 만에 돌아왔지만 고음불가가 됐다.

말을 많이 한날이면 목이 따갑고 아프다.

1년이 지났는데 컨디션은 늘 꽝이다.


지난주에 동생을 따라 캠핑을 가보았다. 밖에서 불편한 잠자리는 딱 질색인데 높은 하늘에 커다랗게 자란 나무와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햇살을 받으며 캠핑의자에 앉아 있노라니 문 살아있지 않으면 느낄 수 없는 것들이라 생각하니 살아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암은 암이고.. 나는 나데..

어느 날은 살기 싫고 어느 날은 살아있고 싶고.

아직도 마음이 칼춤을 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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