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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휘루 김신영 Aug 20. 2023

<말괄량이 길들이기>와 <이춘풍전>의 풍경

강약약강의 치졸한 사회풍경

사회는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하다.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다. 약자인 여성이 당하는 폐해는 눈을 뜨고 볼 수 없으며 귀를 열어 들을 수 없는 지경이다. 


셰익스피어의 대표적인 희극인 <말괄량이 길들이기>(The Taming of the shrew)와 <이춘풍전>을 나는 누구에게도 추천하지 않는다. 이 책은 대표적인 여성 길들이기와 관련이 깊기 때문이다.


shrew [ʃruː] 성질 더러운 여자, 잔소리 심한 여자, 입이 험한 여자, 바가지 긁는 여자의 뜻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이에 상대되는 성질 더러운 남자에 해당하는 단어는 tamper [tǽmpər]이다. 이는 훨씬 유순하며 정상으로 간주되는 특성을 지닌 단어다.


단어를 보기만 하여도 여성에게 훨씬 가혹한 단어를 쓰는 것은 비단 이뿐이 아니다. 말괄량이 여성은 길들여야 하는 대상이나 말괄량이 남성은 정상으로 간주되는 것 같은 현상이 그것이다. tamper라는 단어는 심지어 전문가에게 쓰이기도 한다.


그러나 shrew는 대단히 혐오스러운 단어다. 입이 험하거나 잔소리가 심하거나 성질이 더럽다는 것, 바가지를 긁는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남성의 입장에서 바라본 단어의 뜻이 깊이 내재되어 있다. 남성들이 자신의 말을 잘 듣기를 바라는 태도에서 비롯된 혐오성 단어다.


여성을 ‘다룬다’ 거나 ‘길들인다’는 말은 여성 개인의 개성이 사회 속에서 통용되지 못하는 억압의 상태임을 드러낸다. 당시 1590년의 사회에서 여성은 길들여야 하는 대상이라는 의미이며 남성에게 고분고분해야 한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이 책의 주인공인 케이트는 활달하고 자유분방한 성격이다. 이를 당시 주류인 남성중심의 사회에서 여성의 정체성에 위배되는 것으로 간주하고 얌전하고 순응적이며 남성의 말을 잘 듣는 인간상을 구현하려는 사회적 정체성의 결과로 나타난 것이다. 이러한 사회적인 강요는 여성을 억압하는 처사이며 여성의 개성을 말살하고 남성들의 입맛에 맞추려는 의도임은 두말할 것도 없다.


이때 케이트의 내면은 중요하지 않다. 그의 내면은 관심대상이 아니다. 오직 겉으로 드러난 거친 행동만을 문제 삼아 그것을 중지 내지는 저지시키려 한다. 당시의 사회규범에서 벗어난 여성으로 보고 여성을 남성의 그늘에 도구화하려는 상태라 하겠다.


우리말에서도 이러한 단어가 많이 나타난다. 여성은 흔히 계집이라 하는데 이는 비하어이다. 남성은 사내라 하는데 이는 우월성을 가진 단어다. 여성에 해당되는 욕설과 단어들이 훨씬 비하의 강도나 내용이 심하다. 심지어 말괄량이에 상대되는 단어가 없다. 즉, 여성은 말괄량이라고 지목하면서 얌전해질 것을 종용하나 남성에 해당되는 말괄량이는 없어 상대적으로 인정해 주는 이중적이며 왜곡된 시선이 그것이다. 따라서 한자를 가르칠 때 여자 女, 남자 男으로 가르친다.


현대에도 마찬가지의 현상이 여기저기에서 나타난다. 여자는 얌전해야 한다거나, 순종적이기를 바라는 것이나, 여성의 욕망은 금기시되는 것이 그 현상들이다.


이러한 성담론의 작위적 과정은 남성이데올로기의 지배체제 내에서 활달한 여성을 부정하고 자신들의 손아귀에 넣고 좌지우지하려는 행동이다. 당시에 여성들이 불평등한 사회적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하자, 기존 질서에 반란하는 양상으로 보고 작가의식이 편협한 셰익스피어가 이를 문학작품에 반영하여 길들이기를 시도한 것으로 본다.


여성을 길들이려는 시도는 조선시대에도 작용하여 여성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대표적으로 <이춘풍전>을 살펴보면 당대 남성의 방탕이 얼마나 심했는지를 보여준다. 이때 그의 아내는 현처로 등장하여 현모양처를 강조하고 남편의 잘못도 너그럽게 용서하고 받아들이는 여성이다. 남성의 주색잡기는 당연한 것이며 남아의 상사라는 것이다.


“어질고 착한 아내 머리채를 비단 감듯, 상전시전 연줄 감듯, 사월 초파일 등대 감듯, 뱃사공의 닻줄 감듯, 휘휘 친친 감아쥐고 이리 내리치고 저리 내리친다.”라는 끔찍한 대사가 등장한다. 아내가 남편의 허랑방탕한 생활에 말 한마디 했다고 가정폭력을 버젓이 행사하고 있는 장면이다.


결국 춘풍은 평양으로 가서 기생 추월 이를 만나 가산을 탕진하고 만다. 이에 이름도 없는 어질고 착한 부인이 평양에 감사로 변장하여 등장하고 결국 추월 이를 징계하고 재산을 되찾으며 남편까지 찾아온다.


남편이 어떠하든지 아내는 가정폭력에 시달리면서도 늘 현모양처이며 남편을 받아들이고 용서해야 한다. 이로 보아 조선시대에 남성들은 주색잡기를 하든 패악질을 하든 상관없이 아내는 현모양처를 강요당한 것이다.


즉 조선시대의 여성들은 남편에게 잔소리를 할 수 없었으며 남편이 어떤 행동을 하든지 다 받아주고 용서하며 그를 위해서 살아야 한다는 남성지배를 공고히 하였다는 것이 이춘풍전 등 많은 문학작품에 반영되어 나타난다.


더불어 현대사회는 아직도 여성에게 현모양처를 강요하고 있다. 교과서에 실린 이춘풍전은 문전걸식하게 된 남편을 구하고 이를 받아들인 아내를 변화의 바람으로 읽으며 적극적 여성으로만 읽기 때문이다. 이춘풍의 횡포나 포악한 행동과 더불어 남성중심의 사회가 빚어낸 상황은 반성의 여지를 주지 않고 기타 정황인 여러 문제들이 출제되고 있다.

진취적 여성으로 남장모티브가 등장한다고 정리하고 있으나 가부장적 남성의 포악한 행동과 사회의 묵인, 그리고 유난히 남성에게 관용적인 문화에 대한 반성은 찾아볼 수가 없다. 여러 문제집이나 교과서 활동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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