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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휘루 김신영 Jun 16. 2023

적멸(寂滅)

김신영 시인

돌이켜보면,


나를 흔들어 대던 바람은

한밤의 먼지에 불과했습니다


태양 같은 강열로 후벼내던 가슴도

지나간 밤기운에 불과했습니다


손사래 치며 나를 거부하던 문장까지

불볕에 사라지는 물기에 불과했습니다


잊고자 누워 있던 바위에서 싹이 틉니다

삶을 끊고자 던져버린 불모지에 번뇌가 싹이 틉니다


내내 한 생각도 하지 않고자 오래 걸어온 길에 

거미줄이 아침마다 눈앞을 가립니다


 떨쳐내고자 하여 한 생각도 일어남 없이 지극에 이를 수 있다던

경전의 말씀은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다고 노래합니다


청천 같은 당신의 말씀은 하늘이 북새가 될 때에야

자취를 드러냅니다 덧없이 당신이 떠나자 바람이 몹시 불었던 게지요


적멸에 들고자 하였던 멀리 가지 못한 생각도

바위 끝 모서리에 불콰한 빛깔로 남았습니다


-「적멸(寂滅)」(『맨발의 99만 보』,2017)


 “적멸(寂滅)”은 이른바 고요한 소멸이며, 그것은 곧 죽음과 연계된다. 또 다른 측면에서 ‘죽음’은 그저 단순 소멸에 불과하지만, 불교적 관점에서 ‘적멸’은 번뇌의 세상을 벗어난 높은 경지로, 세상의 경계를 떠난 ‘열반’의 세계를 의미한다.

오래도록 별 탈 없이 잘 살 것 같았다. 이 땅의 삶을 위해 노력한 흔적은 “한밤의 먼지”처럼 덧없고, 성공을 위해 달려온 피나는 열정도 “불볕에 사라지는 물기”처럼 허무해졌다. 경쟁의 구도에서 치열한 삶을 영위하다 세상 모두가 “헛되고 헛되다”라고 느낄 때 자신을 비롯한 주변인들에 “긍휼”의 감정이 솟구친다. 죽음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급기야 하늘이 온통 노을빛으로 물들면 일상은 물러가고 아늑한 적멸의 세계가 펼쳐진다.

  - 김선주 평론가


적멸(寂滅)은 열반과 함께 불교에서 쓰는 죽음을 뜻한다. 살면서 겪는 번뇌를 벗어난 해탈의 경지로 불생불멸을 의미한다. 시인이 불교용어로 차용하여 시를 짓는 것은 초기 시를 짓던 이전의 양상과 분명 다른 모습이다.

“나를 흔들어 대던 바람은/ 한밤의 먼지에 불과했”고 “태양 같은 강열로 후벼내던 가슴도/ 지나간 밤기운에 불과했”고 “손사래 치며 나를 거부하던 문장까지/ 불볕에 사라지는 물기에 불과했”다는 전제적 설정은 마치 『금강경』32분「응화비진분應化非眞分」의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 ’ 여로역여전如露亦如電 응작여시관應作如是觀‘과 그대로 연결되는 듯하다. 세상의 모든 존재물은 꿈, 환영, 물거품, 그림자와 이슬과 번개와 같을 뿐이라는 사실을 시인은 자신의 체험으로 추리해 냈다고 하겠다. - 이덕주 시인


화자는 “경전의 말씀은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다고 노래”한다는 부정의 공간에서 반전을 모색한다. 헛되고 헛된 가운데에서도 “청천 같은 당신의 말씀은 하늘이 북새가 될 때에야/자취를 드러 “낸다고 자신의 종교적 믿음에 확신을 보낸다. 적멸을 통하여 하나님에 대한 인식을 강하게 고양시킨다. 나아가 ”당신이 떠나자 바람이 몹시 불었던 “ 것은 당신 즉 하나님이 자신을 시험하는 것이었다고 결론을 내린다.

시인의 사유체계가 확장되고 있음을 「적멸(寂滅)」에서 실답게 확인하게 한다. 삶에 대한 포용력이 그만큼 커지고 대상을 대하는 시선이 어디 한편에 물들지 않고 포용하려는 양상이다. 그만큼 시인의 연륜과 함께 시도 종교를 초월하여 사색적으로 깊어지고 넓혀진다 하겠다.- 이덕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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