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휘루 김신영 Jun 19. 2023

소리의 옹립(擁立)

김신영 시인

소리의 옹립(擁立)  



오래되었어, 바위틈에 세 들어 사는

내 활자들이 거리를 쓸면서 비척 거린 지는.

붉은 미진(微塵)이 수목과 큰 강을 지나

길에서 길을 만나 크게 웃었지

 

바위산에서는 내 정보가 네게로 넘어가는 소리

화면에 담겨 아우성치느라 그 끝이 환하다


소리에 네가 담겨 오고 내가 담겨 가고

미세한 소리 하늘을 넘어 걷잡을 수 없어

대머리 독수리는 폭풍을 쏘아 우주까지 제압하였다


하여, 소리 내지 마라, 누군가 너를 낱낱이 읽으리

움직이지 마라, 너의 발자국 남김없이 읽히리

울지 마라, 너의 울음 구곡간장 곡곡에 들리리

가지 마라, 준비하지 않았다면 실망뿐이리


잘생긴 얼굴 왕느릅나무가 황제로 옹립되어

파리들 둥글게 모여 열렬하게 박수치는 소리가 울린다


고사목 군락에서 그가 가지를 흔들며

헛기침하는 소리 계곡에 가득히 울린다


아니다, 진물 흘리는 상처, 진초록드는 소리

수백 마리 응애가 이파리에 붙어 응애응애 진을 빠는 소리

불붙는 불개미 수천 마리 젖은 잎으로 둥지 짓는 소리


염소 똥을 굴려 만든 집, 나뭇잎을 돌돌 말아 지은 집도 없이

평생 홈리스로 유령이 되어 우주를 떠다니는 발소리,

풀 여치 뒷다리를 떠는소리, 고사리 새벽에 기지개 켜는 소리


버섯이 먹물을 지고 가는 소리, 집유령거미 그물망 치는 소리

바위틈 이끼가 한 철 물 마시는 소리


그 틈, 에, 나의 황제가 있다


시집 <맨발의 99만보> 2017


위의 시 <소리의 옹립>에서 고안해 낸 “활자”들은 너덜지대 “바위틈에 세 들어” 산다. 그 활자들이 작디작은 먼지가 되어 산천초목을 떠돌며 “깔깔” 소리 내어 웃는다. 활자엔 각종 “정보”가 담겨 생각이 춤을 추고 “내 정보”와 네 정보가 섞여 불안한 화음을 이뤄낸다.

어느새 미묘한 합창이 시작되고, 내 소리와 네 소리를 도통 구분할 수가 없어 세계와 “우주”도 시나브로 카오스 상태다. 당신과 나의 마음 깊은 곳에 자리한 각종 활자와 소리가 미친 듯 굽이굽이 흩날린다. 어디든 찾아가서 듣게 되는 소리의 만찬! 겸허한 자세로 소리를 낮추고, 한 맺힌 마음속을 감추려면 “소리 내지” 말라고 충고한다.

병든 고목이 즐비한 곳에도 “진초록 물이” 든다. 때론 죽은 나무도 생태계에 활력소가 되어, 숱한 곤충을 먹여 살리고 희생의 진가를 발휘한다. 연이어 생명체의 부활 및 재생의 원동력이 된다. 그들 “고사목”이 온갖 만물의 소리와 자연의 소리 그리고 집 없는 유랑자의 “발소리”에 맞춰 극한 리듬을 탄다.

-김선주 평론가

매거진의 이전글 AI, 혹시 당신입니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