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먼저 그의 이름에 대한 자료를 살펴보면 ‘황진이(黃眞伊)’가 아닌 ‘황진(黃眞)’이 나온다. 때로는 진랑이라고 하며 성이 없기도 하다. 따라서 본래 '황진'을 부르기 편하도록 ‘황진이’라 접미사를 붙여 부른 것이 굳어진 것이 아닌가 추측한다.
‘황진이’를 최초로 소개한 글인 허균의『성옹지소록』(惺翁識小錄)에서는 황진이를 ‘진랑眞娘’이라 쓰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의 이름은 ‘황진’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황진’으로 쓰는 것이 맞다. (그러나 그의 이름을 부를 때 여전히 접미사를 붙여야 하는 문제가 있어 황진이로 부르고 있다. 만약 사대부의 이름이 이런 상황에 놓였을 때도 그렇게 불렀을까 싶다. 기록도 없고 하여 접미사가 붙은 채로 오랜 세월을 지나온 것으로 짐작한다) 하나 더 문제로 삼는다면 그는 ‘황’ 씨 성을 잘 쓰지 않았을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진랑’이라 하여 성이 없는 채로 기록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의 어머니가 맹인이라는 것도 정확하지 않다. 마치 요즘에 잡지와 같은 책에 가십거리처럼 등장하고 있다. 이덕형의 『송도기이』나 김택영의 「송도 인물지」는 송도에 전해지는 이상하고 기이한 것들을 모아서 쓴 책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의 일화들은 거의 개작과 왜곡의 가능성을 갖고 있는 내용이다. 인도가 아직도 불가촉천민에게 함부로 대하고 수많은 돌이킬 수 없는 범죄를 일으키듯이 신분이 천하여 함부로 이야기하고 항간에 떠도는 믿을 수 없는 왜곡된 소문도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그대로 기록하고 재미로 떠돌던 이야기를 채록한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또한, 종종 기생과 매춘부가 동일시되는 경향이 있는데 조선 시대의 기생은 예술인(藝人)이자 관청 공무원이다. 이들은 일종의 능력이 있어야 하였다. 아무나 기생이 될 수 없다는 말이다. 일단 기생이 되면 많은 자유를 누리기도 하였다.
그런데 조선 말기에 일제의 지대한 영향 속에서 일본의 저급하고 천박한 문화의 유입으로 인한 참담한 결과로 매춘부가 양산되었으며, 다른 국가의 고유한 문화를 함부로 자국의 변태적인 성문화와 동일시하여 기생을 매춘부로 취급하고 술자리를 벌여 벌어진 비극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