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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통 Mar 24. 2023

노자와 장자에 기대어… 노장老莊을 읽고

책은 ‘바꿔라’가 아니라 ‘삶을 완성하는 방법’을 말하고 있다 



이 책을 잡은 이유는 저자에 대한 존경심과 인지도 때문이었다. 철학 교수의 철학이야기, 얼마나 유혹적인 메시지인가! 학창 시절에 별을 보면서 '누구나' 가졌음직한 인생에 관한 것들, 이 고민에 대한 철학 교수의 그 옛날이 궁금했다. '누구나'가 아닐 수도 있지만, 보통 '누구든' 한번쯤은 경험했을 그 이야기는 - 결국 책을 읽어 보니 우리가 몰랐던 것들이 많았어도 - 그것들은 오롯이 살아온 인생을 조심스럽게 대입해 볼 수 있는 글들이었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아직 성숙하지 않을 무렵에 가졌던 생각이 같았더라는…. 별을 좋아하는 것도 닯았다.


내가 별똥별보다 더 짧은 순간에 사라져 버린다면

내가 그 짧은 순간에 영원을 붙잡을 수 없다면

짧은 순간에 영원을 경험하는 장치는 무엇일까? _22쪽


저자는 어느 상을 받고 쓴 소감문을 이렇게 썼다. 


사람이 문장의 주인입니다.

사람처럼만 살다 보면, 별처럼만 살다 보면 내 문장에도 문자에도 피가 흐르고 그럴싸한 소리가 나리라 믿습니다.

그 피와 소리가 고향도 살리고 시대도 살릴 것입니다.

금방 죽습니다.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_42쪽


누나를 떠나 보낸 것도 저자와 나는 닳았다.


이렇게 1부가 성장기의 자전적 이야기였다면 2부는 '우주를 겨드랑이에 낀 채로'라는 타이틀과 함께 자유와 꿈을 논하고 있다. 궁극의 질문을 하고, 그 질문에 집중하면서 살아가야 한다면서.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나는 어떻게 살다 가고 싶은가?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_93쪽


허무한 존재들이 허무하지 않게 살아가야 한다고 저자를 채찍질한다. "허무한 짓들을 허무한 줄도 모르고 싸지르다가 속절없이 사라진다"고.


순간만 살다 죽을 것을 우리는 왜 굳이 애쓰며 사는가. 다 사라질 것을 우리는 왜 잡는가. 결국 다 털고 갈 것을 왜 굳이 배우는가. 허무한 줄 알면서 왜 사는가. 우리의 존재 조건이 허무함이라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다면, 산다는 것은 허무와의 투쟁이 아닐까? 허무에 지지 않기 위해서. 허무에 지면 왜 안 되는가. 여기서부터는 질문이 불가능하다. 존재의 가장 궁극적 상태이기 때문에 질문도 거기서부터만 출발할 수 있다. 허무하기 때문에 사는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허무를 관찰하고, 허무와 투쟁한다. 허무와 투쟁하면서 나는 나로 살아 있다는 사실이 나에게 확인된다. 자신을 허무에 맡기는 것이 아니라 허무를 관찰하고 투쟁하도록 하는 토대가 허무인 것은 참 모순적이다. 삶을 죽음과 연결해 죽음 쪽에서 삶을 보면 삶이 더 또렷하게 드러나고 충실해지는 것과 같은 이치다. 삶은 자신의 존재 형식인 허무와 스스로 전선을 형성하면서 허무이면서도 허무가 아닌 것으로 재탄생시킨다. 자기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스스로 확인하는 자는 그 순간에 영원을 함께 경험한다. 자기 존재의 자각, '순간'과 '영원'이 교차하는 성스러운 자리다. _107쪽

사람이 하늘과 땅 사이에서 한 평생을 산다는 것은 책받침 두께 정도의 얇은 틈새를 천리마가 휙 지나가는 것과 같다. 홀연할 따름이다(人生天地之間 若白駒之過隙 忽然而已, 『장자』「지북유」. _108쪽


 이어 3부는 '신의 있는 사람'이다. 지적인 사람은 현실에 무게를 두고 그 바탕 위에서 사유를 성실하게 하는 것이다. 성공한 사람은 공(功)을 차고 있지 마라고 권하고 있다.


역사가 더 흐르고 싶어도, 동네가 더 진보하고 싶어도, 혁명을 지속하고 싶어도, 혁명 시기 쌓인 증오를 벗어버리고 싶어도, 화해하고 싶어도, 다른 새 세상을 만들어보고 싶어도, 혁명의 그 기억에 갇힌 한 집안에 발목이 잡혀 있는 한, 한 발짝도 떼지 못한다. 혁명이란 지속적으로 혁명할 때에만 혁명이다. 권력의 교체에 머물지 않고, 정치의 상승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 진보적 혁명을 자처하고도 결국은 보수화되고, 혁명가들은 또 다른 권력자로 남을 뿐이다. 그래서 공이 이루어지고 난 후에는 그것을 차고앉지 말라고 하는 것이다. _126쪽


유유자적하고 장수를 누리는 사람은 쓸모 있는 것이 쓸모 있는 것으로 자리잡기 위해서는 쓸모없다는 소리를 듣는 것처럼, 최고의 단계를 성취해야 한다. 쓸모 있음에 갇혀서 쓸모없음을 지향하는 동력을 상실하지 않기 위해서 새로운 도전이나 높은 상승을 꾀해야 한다. 꿈을 가진 사람은 꿈이 없는 사람보다 훨씬 더 큰 성취를 이루는 법이다.


참된 사람이란?

참된 인간은 고요하게 침묵을 지나간다. 침묵은 자신의 성스러움을 드러내며, 외부의 성스러움을 영접한다. 여기서 위대함이 자란다. 새 세상을 꿈꾸는 자, 우선 침묵하라. '고요'를 경험하라. _154쪽


감동과 호기심이 넘치는 사람은, 이런 사람을 말함이다.


불편함이나 문제점을 발견하고 분노하는 일일 것이다. 누군가가 김밥 집을 연다고 했을 때, 본인이 여기저기를 다니며 김밥을 먹어보다가 맛이나 재료에서 자기 기준에 맞는 김밥을 만나지 못한데 분노를 느끼고 직접 만드는 것이 낫겠다고 떨쳐 일어나는 경우에는 성공할 확률이 높다. 김밥을 먹다가 '왜 이렇게밖에 만들지 못하지?'하고 화를 내본 사람, 김밥을 먹고 실행해본 사람, 그들이 차린 김밥 집은 성공할 가능성이 크다. _162쪽


4부는 지나가는 시선. 


저자는 짐승처럼 과감하게 덤비는 것이 윤리적 인간이 되는 것보다 훨씬 실속이 있다고 일갈한다.


『장자』「거협」편에 나오는 이야기다. "도둑질에도 윤리가 있다. 방 안에 무엇이 있는지 잘 알아맞히면 성스럽다 하고, 선두에 서서 먼저 들어가면 용기 있다 하고, 맨 나중에 나오면 정의롭다 하고, 도둑질에 성공할지 못할지를 미리 아는 것을 지혜롭게 하며, 분배를 공평하게 하면 인간답다고 한다." _177쪽


자신의 생각에만 매몰되지 않는 시선이 필요하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그 가운데 중요한 것이 유연성이다. 실력이 있음을 나타내는 것 중에 하나가 유연성이라는 것이다. 유연성은 자기 각성과 반성을 통해서 상대에게 양보함으로써 내 이익을 더 크게 실현할 수 있는 실력이다. 실력이 없으면 견강해지고 극단화된다.


최저임금제라는 이유가 등장하자마자 바로 찬성파와 반대파로 나뉜다. 최저임금의 정도를 살피는 숙고는 사라지고, 반대 방향으로 누가 더 극단화하는가의 게임으로 변질된다. 최저임금을 하되 정도를 살펴 너무 과격하게 하지 말자고 하면 반대파로 매도하고, 최저임금을 하자고 하는 사람들도 '누가 더 세게 할 수 있는가'하는 문제로만 논쟁한다. 그 결과로 최저임금 인상을 주장했던 본인 스스로도 "최저임금 인상률이 과해서 놀랐다"는 말을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실력은 이론이나 이념의 주장에 있지 않고, 개념의 순수한 적용에도 있지 않다. 잡다하고 변화무쌍한 현실과 대화하여 '정도'를 잘 살필 수 있는 데에 있다. _192쪽


다른 한 구절은 이렇다. 이래야 하는 것이 맞다. 하지만 아무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렇게 하는 '그들'이 한 명도 없다.


"섭공이 공자에게 정치에 대해서 묻자 공자가 답한다. '가까이 있는 사람들은 설득하거나 기쁘게 해주고, 멀리 있는 사람들은 오게 한다.'" _198쪽


마지막 장(章)인 5부는  정해진 마음 넘는 법이다. 타이틀 아래의 글은 의미하는 바가 크다.


 '삶도 내 것이고 죽음도 내 것이며 영광도 내 것이고 치욕도 내 것이다. 내가 주인이기 때문에 인간은 모든 것을 알려고 노력한다.'


저자는 마음을 정하지 말라 한다. '정해진 마음'이 자신의 마음을 차지하는 덩어리가 크면 클수록 '정해진 마음'이 주인이 되어버리기 때문에 그 '정해진 마음'을 철저히 지키는 일이 가장 중요한 일이자 진실을 지키는 일로 바뀐다. 그래서 아무리 크고 중한 일이라도 그것이 '정해진 마음'을 발휘하는 데 방해가 되면 바로 사소한 것으로 취급된다. 이럴 때 사용하는 비굴한 논리들은 모두 상황을 묘사 속으로 끌고 간다. "다른 사람보다는 그래도 덜하다"고 하거나 "나만 그런 것이냐"고 하는 식으로 자신을 정당화한다. 남보다 더 낫기만 하면 된다는 종속적 사고에 빠져 있다.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사람이라면 남보다 더 나은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남과 다를 뿐만 아니라 나만의 고유한 것이 있어야 만족할 것이다. 비굴한 논리를 사용하는 것도 자신을 자신의 존엄 위에 세우지 못하고 '정해진 마음' 위에 세우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불행하게도 염치를 잃어버린다.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게 된다. _210쪽


전체적으로 책은 삶을 주도적으로 바꿔라, 가 아닌 삶과 인격을 완성하는 최고의 방법을 알려주는 것에 목적이 있는 듯 하다. 지금 살고 있는 이 시대의 '버림'을 피해야 한다. 누구든 말이다.  버림은 바로 무관심이자 방관이요 무신경이다. 책은 그 이유를 중국의 고전, <장자>를 통해 알려준다.


우물 속에 있는 개구리한테는 바다에 대해서 말해줘도 소용없다. 그 이유는 그가 우물이라는 좁은 시계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여름벌레한테는 얼음을 말해줄 수 없다. 여름이라는 시간 만 살다 가기 때문이다. 함량이 적은 사람에게 도(道)를 말해봐야 아무 소용없는 것은 그가 자신만의 좁다란 진리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_229쪽


그럼 답은 무엇일까? 대답하던 습관을 질문하는 습관으로 바꾸라고 권한다. 대답은 과거를 따지는 일을 중시하다 보니 기준에서 이탈하지 않고 과거를 공유하는 것에 집착한다. 활동이나 논의는 진영으로 논리로 귀결된다. 우물 안에서 왼쪽으로 있다가 오른쪽으로 옮기고, 오른쪽에 있다가 왼쪽으로 옮기는 것을 큰 변화나 생명력으로 착각한다. 미래를 실현하지 못하고 평생 과거 만을 살다 간다.


하지만 '질문'은 우물 안에서 우물 밖을 꿈꾸는 상상력을 발동하게 하는 지적 활동이다. 지금 현실적인 문제는 ‘대답’의 기능으로 닿을 수 있는 가장 높은 곳에 이미 도달해버렸다. 그 다음을 노려야 하는데, 우물 밖을 향해 튀어 나가는 도전이 바로 '질문'이다.


앞서 말했듯이 책(말)이라는 것이, ‘바꿔라’가 아닌 ‘삶을 완성하는 방법’을 말함이다. 나는책을 통하여 그 '방법'을  접수했다. 한 사람의 삶은 전적으로 그 사람이 가진 시선의 높이가 결정한다. 누구나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시선의 높이까지만 살다 간다.


책은 완성하는 방법을 정치와 국가까지 넓혀서 다뤘다. 하지만 그 비전을 바꾸는 일은 보통 사람의 몫이 아니다. 정치인들이 이 책을 꼭 읽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 하지만 그들은 책을 읽을 시간이 없을 것이다. 책 읽는 시간을 상대방을 조지는 어젠다 개발에 쏟아야 할테니까 - 현재 국내 정치는 배타성과 분열 말고는 남아 있는 게 없고, 그로 인해 보통의 사람들은 희망 또한 없다고 믿고 있으니까…. 아마도.


우리 모두가 새겨야 할 타투 같은 글로 책을 읽은 후 여전히 태동하는 느낌을 마무리한다.


루쉰은 말한다. 우매하고 연약한 국민은 바로 구경꾼으로 전락한다. 자기 자신의 생명이 좌우되는 일에서도 구경꾼 역할밖에 하지 못한다. 구경꾼들은 비판하고 분석하는 데에 재능을 발휘한다. 그리고 분석 비판 이후에는 할 일을 다 했다고 스스로 인정하면서 진실한 삶을 살고 있다고 자위하며 도덕적 우월감을 갖는다. 그 우월감은 자신을 정당화하는 데에 매우 효율성이 높다. 그래서 언제나 자신은 자신에게 옳은 사람으로 남는다. 물론 다른 사람들에게는 비웃음을 사지만, 자신을 알지 못하고 또 알더라도 인정하지 않는다. 루쉰의 고뇌는 늙고 병든 중국이 이런 구경꾼들로 채워져 잇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구경꾼이면서도 스스로를 도덕적으로 옳은 사람으로 조작해버리는 우매한 사람을 '아큐(阿Q)'라 이름 지었다. 루쉰이 보기에 당시 중국인들은 모두 '아큐'들이었다. _2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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