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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통 Aug 29. 2023

울음과 웃음

울음을 무시하면 망한다, 막힌 세상 웃음으로 깨트려라


“저는 한 게 없습니다. 그저 그 분의 그림자를 좆아 갔을 뿐입니다. 낮은 곳을 향하여 하염없이 내려가는 그 분을 존경합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2012년 11월 개봉했던 영화 <철가방 우수 씨>의 주인공 역을 맡았던 최수종 씨가 시사회장에서 한 출연 소감이다. 고아로 자란 주인공은 희망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저 아래 밑바닥에서 생활했다. 교도소에서 참회의 생활까지 하게 된다. 그는 수감됐던 그곳에서 작업 수당을 받는다. 

교도소에서 한 잡지의 글을 읽은 그는 받은 수당을 가지고 소년 가장을 돕는다. 도움을 받은 소년으로부터 편지가 오고 그는 편지를 읽고 또 읽는다. “얼굴도 모르는 아저씨, 감사합니다.” 우수 씨는 하염없이 흐느낀다. “감사하다고? 나한테 감사하다고 말했어. 나한테도 감사하다는 사람이 있어요.” 작은 시냇물을 옮겨 놓은 듯 그의 눈에서는 끊임없이 눈물이 흐른다.

후원하는 아이들을 위해 보험을 들고, 후원하는 아이들의 사진액자들을 매일같이 닦고, 아이들을 위해 무엇을 해줄까를 틈날 때 마다 고민하고. 나눔의 생각만으로 일하고 먹고 자고. 그랬던 그는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장례를 거둘 피붙이마저 없었던 그가 행동으로 남긴 유언은 영혼의 문신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새겨주었다. 

영화는 끝나고 마지막 자막은 파란 피멍의 색깔로 내 가슴 속에 새겨졌다. “고 김우수 선생의 낮은 자가 더 낮은 자를 섬기는 삶은 이후 대한민국의 기부와 나눔 문화를 촉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영화가 상영되는 동안 울음의 들숨과 날숨들이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같이 갔던 일행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렇게 흘리는 눈물은 마음을 정화시켜 준다.

우리의 인생에서 울음은 두 종류다, 기쁨과 감동의 순간에 마음을 꽉 채운 옹달샘이 분수처럼 위로 솟구칠 때 엉엉거리는 울음. 떠나고 또 떠나 가슴이 아플 때, 하얀 그리움으로 먼 곳을 바라볼 때 검은 유리창이 앞을 막아 캄캄해질 때면 나오는 울음. 

어쩌면 울음은 아픔이다. 몸이 아니라 마음이 아프면 울음은 나온다.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은 슬픔이다. 슬픔은 우리한테 울음으로 온다. 울음은 간절한 외침이며 표현이다. 나를 표현하는 것, 투명한 영혼 같은 방울들의 연속이 바로 울음이다.

슬픈 감정에 빠져 헤어나지 못한 적이 있다. 누이를 잃고 나서다. 버스의 차장 밖으로 누이와 함께 걸었던 거리가 나타나면, 그녀가 걸었던 아스팔트 위를 거닐 때도, 바로 곁에 있어야 할 누이가 없다는 생각만해도,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울음은 희망이라는 것을 그때 알았다. 꿈에서 깜빡 거리는 그녀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희망은 울음 뒤에 찾아 왔다. 세상 사람들에게 아무 아픔이 없었다면 지금의 자리가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도 울음의 뒤끝이다. 쉽게 표현하지 못한 울음 한 개씩은 모든 사람들이 품고 있는 듯 했다.

울음은 새로움이다. 울음 뒤에는 앞을 생각하게 된다. 눈물의 방울들이 돋보기처럼 앞날을 확대해 준다. 그래서 울고 나면 개운하다. 울음은 쨍쨍한 햇볕처럼 기분을 바삭거리게 만든다. 울음의 크기는 우리가 받는 사랑과 같다. 사랑이 크면 울음이 크고, 큰 울음은 맑은 깃털처럼 온화하다.

나무도 사람과 같다. 햇볕을 많이 받지 못한 나무의 잎들은 더 빨리 지고 만다. 온 몸에 햇볕을 사랑으로 받은 잎은 나무와 훨씬 오래 함께 한다. 울음은 슬픔이 아니다. 어쩌면 기쁨일 수 있다. 아무나 우는 것은 아니다. 울음의 뒤에 밝은 세상이 보인다. 눈물은 우리의 눈을 가로막고 있던 오염물질을 말끔히 씻어주기 때문이다. 

철가방 우수 씨가 그랬다.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 그 눈물에 관객도 울었다. 우수 씨의 눈물은 전염성이 강했다. 울음의 눈물, 눈물의 울음은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었다. 울지 못하는, 울지 않는 사람은 세상을 지휘할 수 없다. 어쩌면 그들, 국민 앞에서 국민을 위해 일하겠다는 그들도 울음을 절제하지 못하고 결국 눈물을 보이는 것인지도 모른다.

‘만일 내가 무엇인가로 돌아온다면 눈물로 돌아오리라, 너의 가슴에서 잉태되고 너의 눈에서 태어나 너의 뺨에서 살고 너의 입술에서 죽고 싶다, 눈물처럼.’ 그래서 이름 모를 한 시인은 울음 꽃인 눈물을 이렇게 읊었으리라.


울음이 있다면 저 반대편에는 웃음이 있다. 울음이 하늘이라면 웃음은 땅이다. 하늘을 향해 흘리는 눈물을 훔쳐내고 땅을 보며 웃을 줄 알아야 한다. 땅의 기운이 발바닥에서 온풍을 타고 올라오면 웃음이 나와야 한다. 울지 못하는 사람은 웃지도 못한다. 

요즘 젊은이들은 울지도 웃지도 않는다. 괴로울 때 웃어야 한다. 웃음이 마음을 만들기 때문이다. 미륵불은 언제나 웃는 모습이다. 보는 사람마저 미소 짓게 만든다. 웃음은 그런 것이다. 웃음 바이러스라고 하는 이유다. 웃지 못한 자는 세상을 지배할 수 없다. 웃음은 평화와 자유이기 때문이다.

앞에 소개한 누이의 웃음소리는 언제나 “까르르” 였다. 무척 잘 웃었다. 그녀의 웃음소리는 신선하고 경쾌했다. 잘 웃어서 더 예뻤다. 교육방송이 막 시작했을 때였다. 누이가 퇴근 길에 기타 하나를 사들고 왔다. 방송에서 시작하는 기타 강습 프로그램을 통해서 기타 연주법을 공부하기 위해서였다. 방송 시간을 맞추기가 쉽지 않아 기타의 쓰임새는 일정하지 않았다. 나는 누이의 긴 스카프로 기타의 위아래를 묶고는 엘비스 프레슬리를 흉내 내곤 했다. 그 때마다 누이는 “까르르 까르르” 배를 잡고는 쓰러지곤 했다. 누이는 맘껏 웃었고, 나는 즐겼다. 웃음의 크기만큼 울음이 커진다는 것을 누이를 잃고 알게 됐다. 웃음은 그런 것이다. 웃음은 뭐든 크게 해주는 힘을 갖고 있다.

출근길이었다. 유난히 노란 은행잎들이 인도를 가득 덮고 있었다. 가을의 작별은 화려했다. 그 새벽 녘, 가로등 불빛으로만 사람을 확인할 수 있는 이른 시간. 몇 십 미터 앞에서 한 사람이 열심히 거리를 쓸고 있었다, “저 분한테는 가을이 힘겨운 고난의 시간이겠구나.” 생각하며 걸음을 재촉했다. 지하철을 놓치지 않으려고 초 싸움에 신경을 곧추 세웠다. 그 와중에도 가까이에서 본 청소부는 놀랍게도 중년의 여성이었다. 그때의 느낌을 나는 페이스북에 이렇게 실었다.

‘새벽, 가을을 쓸어 담는다. 손길, 힘듦을 내려 놓는다. 시선, 아래를 바라 웃는다. 고독, 외로워 생각 않는다. 희망, 내일을 세워 놓는다.’ 무거운 인생의 어깨 너머에 희망이 웃고 있음을 말하고 싶었다. 웃음이 희망을 스케치하고 있으려니, 마음 속으로 아주머니를 응원했다.

나는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땅과 신발 사이에서 뭔가 눌러지며 톡톡거린다는 것을 느꼈다. 아주머니의 힘듦을 알 수 있기에 발을 에둘러 피해 보았다. 나무에서 자신의 무게를 지탱하지 못한 은행이었다. 은행의 밟힘을 피하기는 쉽지 않았다. 서서히 리듬을 타고 경쾌함마저 느껴졌다. 발로 맛본 은행이 몇 개인가? 

아뿔싸, 지하철 안에서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얘, 어디서 똥 냄새 나지 않니?” 친구와 함께 옆 자리에 앉은 아가씨였다.

“킁킁... 킁킁...” 친구는 코를 이리 저리 돌려가며 냄새를 흡입했다. 내 몸 근처의 위 아래까지 코를 갖다 대며 킁킁거리다가 순간 나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저요? 아닙니다. 그럴리가요.” 하면서 발아래 쪽을 내려다보다가 기겁했다. 은행 두 개가 짓눌린 채 바닥에 붙어 있었다. 마치 똥처럼.

“옆 사람이 똥 밟았나 봐.” 아가씨가 친구 귓속에다 말했지만, 그 음성은 나에게도 들려 왔다.

밟지 않은 똥, 똥 냄새 나는 은행, 밉다 미워. 괜히 부끄러웠다. 웃음이 나왔다.

“제가 오는 길에 은행을 밟았나 봅니다.”

“똥이 아니어서 다행이네요.” 아가씨는 물러서지 않았다.

우리는 함께 웃었다. 웃음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겸연쩍은 순간에도 웃음이 상황을 반전시킨다. “은행 냄새가 이 정도니? 얘야, 우리 술안주로 은행먹지 말자.” 아가씨의 다짐도 나를 웃겼다.

그 다음날, 출근길. 밤새 첫눈이 내렸다는데 내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첫 눈을 도둑맞은 것이다. 첫눈을 보았다면 기쁨의 웃음이 온 세상을 환하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첫눈을 도둑맞았기에 맹숭한 웃음이 있고 더 큰 웃음은 저축할 수 있다, 세상사는 것은 다 그런 것이다.


울음은 무시하는 사람은 망한다. 울음을 외쳐야 하는 곳에서 진정성 있는 눈물은 세상을 바꾼다. 울고 싶을 때 울어야 한다. 울음을 억지로 참으면 몸 속에서 눈물은 화석이 된다. 딱딱한 돌처럼 굳으면 마음의 감정은 단단한 동토의 공간을 만들어 버린다. 울음 뒤에 찾아오는 장면은 빛 바랜 사진처럼 추억으로 마음을 밝게 만든다. 

남에게, 그리고 세상에게 막힌 창을 웃음으로 깨트려라. 슬퍼지면 눈물의 노래를 부르고, 화가 날 때 환히 밝은 웃음을 터뜨려라. 세상을 아름답게 보는 마음의 눈이 생겨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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