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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통 Mar 14. 2024

다시 사랑할 수 있다면…

우리 모두는 사람이 아니어도 사랑에 빠질 수 있어야 한다

세상은 자기 마음대로 될 수 없다가 맞나, 세상은 자기 마음대로 된 적이 없다가 맞나? 요즘 세상이 참 소란스럽다. 하지만 소란과 몽니 부리는 세상에서도 우리 개개인은 살맛 나게 살아가야 한다. 눈을 살짝 돌리면 좋은 사람들, 좋은 꿈, 좋은 말들, 좋은 징후들, 좋은 만남들 등 모두가 느낄 수 있는 ‘좋은’ 천지가 될 수 있으니까. 가끔 후회마저 좋을 때가 있다. 가슴에 새긴 좋은 기억들, 그것들은 추억이 되고 사랑의 꽃을 피어 좋은, 우리의 기억이 되어줄 수 있으니까 말이다.


어떨 때는 쉬는 ‘숨’이 참 좋다고 느끼곤 한다. 우리 마음에 향기 나는 바람이 찾아오듯이. 좋은 향내를 담은 바람이 숨 쉬는 공간을 통하여 우리를 좋게 만들어주어서다. 


봄바람이 머지않았다. 사랑은 봄을 타고 오고, 우리가 사랑에 올라탈 수 있는 봄 말이다. 좋은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다면, 삶이란 퍽 살 만하고 봄노래라도 읊조릴 수 있을텐데…. 소란스러운 세상이라도 하늘을 바라보며 좋은 숨을 쉬었으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역시 사랑이 최고다. 아주 오래전 노래인데, 가수 백미현의 ‘다시 사랑할 수 있다면’이라는 곡이 있다. 가사 중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다시 사랑할 수 있다면/ 돌이킬 수 있다면/ 언제까지 너에게 머물러/ 쓸쓸한 그 자리에/ 그댈 남겨두진 않을거야/ 다시 사랑할 수 있다면…’.


일본의 정형시 ‘센류(川柳)’는 짧은 문장으로 언어를 표현하는데, 일본인이 일상에서 비교적 가깝게 접하는 문학 장르의 하나다. 최근 실버센류 역대 입선작 가운데 일부를 한국어로 번역한 단행본이 나왔다. 제목은 ‘사랑인 줄 알았는데 부정맥’(포레스트북스)이다. 교보문고가 집계한 2월 첫 주 베스트셀러 순위에서 시 부문 1위에 올랐다. 그 중 하나의 시는 이렇다.


‘손을 잡는다/ 옛날에는 데이트/ 지금은 부축/’.


칠십이 넘은 어르신이 응모한 작품이다. 그림이 그려지듯 머리와 마음에 상상이 되는 글귀가 아닐 수 없다. 사랑에는 나이의 한계가 없으니 데이트가 아닌 부축의 손잡음 역시 사랑이럿다.


누가 사랑의 대상은 꼭 사람이어야만 한다고 한 적이 있는가! 당연히 없다. 그렇다. 사랑의 상대는 제한이 없다. 그래서 세상의 시끄러운 소음만큼 사랑으로 소란을 피울 장르들은 무한하다.


이야기의 방향을 나에게로 돌려본다. 지금 나는 그림을 사랑하고 있다. 정확하게는 어반스케치이다. 어반스케치는 여행지나 일상 속 풍경을 그리는 것을 말한다. 어느덧 나의 어반스케치는 진화를 거듭했다. 올해 들어서는 드로잉 일기를 쓰고 있다. 하루도 건너뛰지 않았다. 바로 어반스케치와 사랑에 빠진 덕분이다.


여행을 갈 때면 어반스케치 용도로 사진을 찍는다. 그 가운데 멋진 컷을 골라 어반스케치로 남기는 기록을 놓치지 않는다. 그 중 몇 개의 작품을 골라 그룹전시회에 참여한 적도 세 번씩이나 된다. 어찌 사랑의 장르가 무한하다고 아니할 수 있겠는가.


2년 전 2월에는 반려견을 입양했다. 견종이 토이푸들인데, 그 아이가 이제 세 살이 됐다. 나는 그를 ‘강아인(人) 루체(luce)’라고 부른다. 나와 루체는 눈으로 소통한다. 기분이 좋은지, 화가 났는지, 용변이나 산책을 원하는지, 간식이 먹고 싶은지, 휴식을 취하고 싶은지, 무엇이든 자기의 감정을 루체는 눈으로 전달한다. 마치 사람(人)같아서 신기하고 신비로울 정도다.


그러니 루체한테 향하는 사랑의 시작은 그의 눈으로부터 시작됐다. 루체의 슬픈 눈은 압권이다. 50원짜리 동전 만한 크기의 검은 눈동자에 들어있는 폭발물 같은 슬픔을 보면 함께 슬퍼진다. 루체의 감정이 이내 전염된다. 루체의 가장 슬픈 눈은 이런 경우에 발동한다. 자기 만을 남겨놓고 식구들이 모두 외출할 때다.


실버센류의 시처럼 데이트할 때 잡았던 손이 부축할 때 잡은 손이 되듯이, 가족들이 외출하면 패밀리그룹에서 떨어져 홀로 외톨이가 되어서라고 추측한다. 루체가 외로움을 극도로 싫어하니 가족들은 외출을 싫어한다. 루체의 눈이 전해주는 그 슬픔 때문이다. 누군가를 혼자 두는 것이 자꾸 마음에 걸린다면 그것은 사랑 때문이다. 노래 ‘다시 사랑할 수 있다면’의 ‘쓸쓸한 그 자리에 그댈 남겨두지 않을거야’라는 가사처럼 말이다.


청춘들의 불타는 사랑도 좋다. 그러나 사랑이 오직 사람을 향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나는 그 사랑을 반대한다. 세상에는 보이지 않는 힘의 원천이 있는 것 같다. 그것이 바로 ‘사랑’이라고 믿는다. 위기에 처했을 때 힘의 근원이 살짝 그 일부를 떼내어 준다면 사랑이다. 


그래서 사람을 대상으로 하지 않는 사랑은 심호흡은 아닐지라도 짧은 호흡을 가능하게 한다. 내가 그랬다. 1년 여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난 엄마와의 이별이 무너진 세상만큼 큰 아픔이었을 때 어반스케치를 사랑하면서 아픈 나의 마음을 치료했다. 그 때의 사랑은 찰나의 호흡일지라도 산소탱크 처럼 나에게 삶의 기운을 북돋워주더라. 그리고 좌절할 이유가 점점 줄어들더라.


사람은 자신의 둘레에 쌓여있는 벽을 높다고 생각한다. 그 벽을 뛰어넘을 수 없을 정도라며 한탄한다. 하지만 각자의 벽들이 모두 높다고 치면 세상 사람들은 그야말로 감옥에서 살고 있는 셈이다. 그런 감옥 같은 벽을 뛰어 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역시 사랑이다. 반려견 루체를 사랑하게 된 것은, 성인이 된 자녀들이 곁을 벗어나고, 비워진 손안에 스마트폰 만을 쥔 채 거북목이 되어갈 무렵 루체를 만났고, 그대로 사랑에 빠졌다.


우리는 내 앞에 벽이 다른 사람의 벽보다 높다고 미리 예단해서는 안 된다. 벽을 넘어가는 방법을 찾는 것이 우선이다. 벽 안에 갇혀있는 힘의 기운이 좌절과 한탄으로 주저앉게 해서도 안 된다. 숨을 쉴 수 있는 틈을 찾아 또다시 고행의 반복을 끊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제 나는 사람을 대상으로 하지 않는, 세 번째 사랑에 빠지고 있다. 그것은 기타(guitar) 연주이다. 배움 곡으로 에레스 뚜(Eres Tu)를 골랐다. 손가락을 찢어가며 코드를 눌러도 어긋나는 소리가 정확한 소리를 앞선다. 그럼에도 곡을 통하여 사랑을 음미하면서 살이 굳어진 손가락 끝으로 세 번째 하트를 만들어간다. 


‘당신은 내 마음의 샘물과도 같아요/ 당신은 내 화로의 불과도 같아요/ 당신은 나를 태우는 불씨와도 같아요/ 당신은 내 빵의 밀가루와도 같아요/’.


여기서 ‘당신’은 바로 ‘사랑’이다. 다시 사랑할 수 있다면, 우리 모두는 사람이 아니어도 사랑에 빠질 수 있어야 한다. 청춘남녀의 불타는 사랑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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