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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당연한 것이 귀해졌다》

생각 속에서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이 버려지지 않게 해야…

by 별통

일본 지하철에서는 백팩을 앞으로 메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가방을 뒤로 멜 경우 뒷사람에게 불편함을 주기 때문이다. 이러했던 일본인들의 대중교통 에티켓이 바뀌고 있단다. 앞으로 메는 백팩도 ‘메이와쿠’(迷惑, 민폐라는 의미의 일본어)라는 목소리가 커졌기 때문이란다.


앞으로 멘 백팩 위에 스마트폰을 올려놓고 볼 때 팔꿈치가 옆 사람을 건드릴 수 있어서가 이유였다. 그래서 서류 가방처럼 백팩을 한 손으로 들어 차지하는 공간을 최소화하자는 의견이 호응을 얻은 것이다. 일본에서 ‘백팩을 앞으로 메고 전철 타기’가 정착한 건 2018년 이후였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는 시민의식으로, 일본은 역시 인성의 강국이다.


나는 오래 전부터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는 백팩을 한 손으로 들었다. 다른 사람에게 불편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인성(人性)적 접근이었다. 혼자가 아닌 삶 속에서 배려는 기본이라 여겼다. 하지만 사람의 성품은 가지각색이다. 모르는 타인으로부터 영향을 받을 때 ‘좋고 나쁘다’로 평가하는 것은 감정의 개입이다. 결국 마음의 불편하기 때문일 것이다.


신호등 없는 횡단보도를 건너려고 할 때 자동차를 잠깐 멈추어주는 운전자가 있는 반면 많은 차들은 쏜살같이 지나간다. 멈춰선 자동차 앞에서 ‘감사하는 마음’은 순간적으로 발현한다. 그래서 잠깐 정지해준 운전자에게 가볍게 목례를 하거나 손 인사를 한다. 이 역시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이 더 많다.


일을 하다가 불현듯 내가 가장 많이 생각하는 단어가 무언지 궁금해졌다. 바로 생각해보았다. 많이 단어들이 앞다투어 튀어 오르기 시작했다. 사랑, 행복, 건강, 돈, 가족, 성공, 미움, 그리움, 사람 등등. 여기서 사람은 왜 생각났을까? ‘나혼자 산다’가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돌고 도는 것이다. 모든 것들은 사라진 듯해도 아니다. 조금씩 변하고 있을 뿐이다. 앞서 일본의 백팩 사례처럼, 세상의 순리 역시 환경에 따라 바뀌고 있다.


삶도 마찬가지다. 굴곡과 고뇌의 순간마저 매혹적이라고 여기는 이유이다. 나타나서 그 자리에 고착이 아닌, 모든 것은 등장했다가 사라지는 반복의 연속이다. 커튼콜처럼 끝났지만 끝난 게 아니다.


이렇게 변화와 진화의 세상 속에서 우리는 서로의 균형으로 살아간다. 그래서 자신이 그려놓은 척도 속에 함몰되어서는 ‘남’을 잃어버리고 만다. 사람은 나침반 같이 살던지, 나침반 같은 사람이 되던지, 한 개의 젓가락이 아니라 한 짝, 바로 두 개의 젓가락이어야 한다.


세상과 자연은 순리대로 살아가야 한다. 비가 바람과 함께 오면 우산으로도 피할 수가 없다. 그럼? 바람부는 대로 맡기는 것이다. 단순하다. 그래서 순리는 맛을 생성할 수 없다. 단맛도 아니고 쓴맛이 나는 것도 아니다. 단지 비바람이 함께 와도, 세상에서 진심을 다해 살아가는 과정 속에 있을 뿐이다.


사람들은 앞만 보고 살아가려고 한다. 하지만 옆에도 눈이 가고, 걸어왔던 뒤쪽도 돌아봐야 한다. 옆도 보고 뒤도 보고 앞을 봐야 역리(逆理)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기쁜 일 만큼 슬픈 일도 가슴에 담아둘 때 앞으로 가는 발걸음은 경쾌하고 가벼워지는 것처럼.


그래서 나는 삶의 지혜란 바로 인성을 갖추고 순리대로 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폭풍우가 몰아쳐도 순리에 몸을 맡겨야 생존할 수 있다. 요동치는 큰물이 덮쳐도 순리의 믿음을 가지면 두려움을 거둬낼 수 있다.


노자가 말했다. “천하는 신비로운 것이어서, 다스리고자 하나 인위적으로는 다스릴 수가 없다. 인위적으로 다스리고자 하면 실패하고, 천하의 지배권을 잡고자 하면 그것을 잃는다.”


순리는 인위적인 것으로도 밀어낼 수 없음을 말함이리라. 그러나 작금에 순리를 거스르는 일들이 잦다. 참견하기가 버거울 정도다. 삶의 순리, 그 ‘결’을 자꾸 거꾸로 돌리지 말아야 하는데, 걱정이다. 더구나 인성의 상실이 빈번해지는 현장을 자주 목도한다.


동전을 잔뜩 준비해 기계 앞에서 인형을 뽑으려고 할 때 저팔계의 삼지창 닮은 세 갈래의 금속 갈퀴는 왜 그렇게 힘없이 흔들리는지, 마치 인대가 끊어진 것처럼 가늠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정성을 듬뿍 담아 동전을 넣었는데 얻어낸 것이 전혀 없다고 해서 ‘허무인생’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삶은, 새로 산 옷의 라벨을 긴장하며 뜯어내고는 조심스럽게 입는 것과 같다. 멋진 모습을 기대하면서, 삶은 연속과 유지의 범주 안에서 달리다가 걷다가를 반복한다. 누구나 정성으로 시작했던 인생은 세월이 흐르면 닳고 닳아 회색 벽 한 켠에 서 있는 의류보관함에 들어가는 옷처럼 너덜너덜해지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순리와 인성이라는 두 트랙을 항상 마음에 품고 살아간다면 인생에서 긍정이 부정을 앞지를 수 있다고 확신한다. ‘성공을 위해 살지 말고 사랑을 위해 살아라. 세월에 닳아 없어지기 전에 사랑해라. 그러면 우리한테 사랑만은 남는다. 낡은 옷 같은 인생을 버리고 사랑을 얻었다면 비로소 아름다운 삶 아닌가!’


세상에는 보이지 않는 힘의 원천이 있는데, 그것은 사랑이다. 너무나 당연한 것 같은 ‘사랑’인데, 보통의 사람은 사랑을 잊고 살고 있다. 숨을 쉬고 있으면서도 산소를 잊고 있는 것처럼. ‘생각’을 생각하는 것을 잊고 있을 어느 즈음, 생각을 움직여 생각하는 단어를 끄집어내어 본다. 어떤 단어가 떠오르는가? 사랑·인성·순리….


생각 속에서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이 버려지지 않게 해야 한다. 사람은 자신의 둘레에 쌓여 있는 벽이 가장 높다고 생각한다. 뛰어넘을 수 없을 정도로 높은 벽이라고 한탄한다. 하지만 마음속에 있는 벽들이 모두 높다면 세상은 그야말로 감옥이 되고 말 것이다.


내 앞에 있는 것이 다른 사람의 벽보다 높다고 예단도 하지 말아야 한다. 좌절과 한탄으로 주저앉아 버리면, 당연한 것들까지 벽으로 변한다. 나는 마음의 벽이 높아지려 할 때 정호승 시인의 말을 끄집어낸다. ‘세상의 모든 벽은 문이다.’ 당연한 것이 벽에 가두어지기 전에, 또 당연한 것이 사라지기 전에, 생각 머리를 자주 사용한다면 세상은 당연히 좋아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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