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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하 작가의 <단 한 번의 삶>을 읽고…

단 한 번의 삶이 단 한 번만 쓸 수 있는 예쁜, 착한 글로 표현되기를

by 별통

유명 작가는 머리가 좋다는 생각을 책을 읽을 때마다 늘 한다. 어떤 책이든 읽고 나면 매번 그렇다. 그것은 언젠가 소설가 안정효의 글쓰는 법을 통해 얼추 짐작할 수 있었다. 머리가 좋거나 메모를 잘 하거나, 하는 것. 안 작가는 메모를 잘 한다고 했다. 그레서 메모가 모여서 '보물창고'가 된다고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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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하 작가는 머리가 좋은 것 같다. 메모를 한다는 내용을 그의 글에서 읽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의 <단 한 번의 삶>을 읽고 나서는 나의 생각이 더욱 굳어졌다. 한편 '나는 작가가 될 수 없겠구나' 싶었다. 머리가 나쁘고, 메모하는 것을 귀찮아하니까.


김 작가의 글은 참 편하다. 아마도 경험했던 일들을 글로 풀어내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글을 어렵지 않게 쓰는 것 떄문일 수도 있다. 그의 글은, 미술로 치면 추상화 보다는 사실화에 가깝다고 나는 결론낸다. 눈으로 보면서 그림의 내용을 파악하고, 멋짐의 여부를 평가할 수 있는 것처럼.


이 책을 읽으면 작가가 86학번이라고 나온다. 나는 작가 보다 몇 년 앞선 학번이다. 그렇지만 - 아니 '그래서' 인가? - 2학년 전방부대 입소 훈련 과정에서 생생한 기억의 차이가 있다. 그는 추웠다고 했는데, 나는 날씨에 대한 기억이 없다. 산을 넘고 또 넘을 때 땀을 많이 흘렀던 것, 그래서 목이 말랐던 것 밖에는.


아마 입소 시기가 달라서였을 것이다. 저녁식사 시간이었다. 해가 막 서산 너머로 넘어가서인지 산중의 공간은 살짝 어두워질 무렵이었다. 식판를 받아들고 부대(아마 7사단 이었던 것 같다. 나중에 둘째가 7사간에서 복무했다. 인연인지 우연인지...) 현역군인한테 밥과 반찬을 받았던 과정이 생각난다. 마치, 나를 놀리듯 구운 생선(조기였을 듯) 한 마리를 건들건들 흔들더니 식판에 툭 내려놓았다. 나는 몹시 불쾌했다. 아마, 바로 식판의 내용물을 잔반 처리통에 붓고 그날 저녁을 굶었던 것 같다.


작가가 아닌 나는, 전방부대의 사건을 이렇게 가물가물 기억한다. 작가는 그 전방부대의 일주일이 인생에서 제일 힘든 순간일거라고 언급하고 있다.


'전두환 정권은 학생들에게 군사훈련을 시켰다. 대학생들도 남자는 일주일에 한 번 교련복을 입고 등교했다. 1학년 때 일주일, 2학년 때 일주일은 군부대 입소 훈련도 시켰다. 1학년은 성남 문무대로 들어갔지만 2학년은 최전방으로 보내졌다. 전방 고지의 3월 초는 매서웠다. 새벽이 되면 기온이 급강하했다. 전투화 속의 발이 얼어버리는 것 같았다. 시간이 전혀 흐르지 않는 것만 같던 그 추운 경계초소에서 덜덜 떨며 생각했다. 이때가 내 인생에서 제일 힘든 순간일거라고.' _155쪽


<단 한 번의 삶>은 누구에게 똑같다. 두 번 세 번의 삶이 간혹 있겠지만, 사경을 넘어서고 나서야 나오는 말이라서 일반화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렇다. 단 한 번의 삶은 어때야 하는가? 작가는 어린 시절 부터 현재 시점에 이르기까지 그의 삶에서 생산한 스토리를 글로서, 말처럼 하고 있다. 상황의 설명과 약간의 비틈을 통한 가정(假定)의 상황으로 삶의 방향을 말하고자 했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는 기대와 실망이 뱅글뱅글 돌며 함께 추는 왈츠와 닮았다. 기대가 한 발 앞으로 나오면 실망이 한 발 뒤로 물러나고 실망이 오른쪽으로 돌면 기대도 함께 돈다. 기대의 동작이 크면 실망의 동작도 커지고 기대의 스텝이 작으면 실망의 스텝도 작다. 큰 실망을 피하기 위해 조금만 기대하는 것이 안전하겠지만 과연 그 춤이 보기에도 좋을까? _61쪽


나는 책을 통해 작가의 단 한 번의 삶이 무욕이었고, 뼈아픈 반성 보다는 바람이 흔들릴 정도의 갈등 수준이었다고 느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절대 오버하지 않는 중용의 삶이었다는 것. 그것은 나의 인생, 즉 나의 단 한 번의 삶이 가지고 있는 '힘'(power보다는 그의 position이라 할 수 있다)을 남용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의 단 한 번의 삶이 다른 이들한테도 단 한 번의 삶일테니, 그 중요함을 알진대 어찌 내가 타인의 삶에 방향타가 될 수 있겠는가! 라는 관념을 철저히 지키고 있었다.


그들 중 꽤 여럿이 교수실로 찾아와 같은 질문을 던졌다.

"제가 작가가 될 수 있을까요?"

그럴 떄면 나는 그런 질문을 하는 이유를 물었다. 작가가 되고 싶으면 계속 쓰면 되고, 되고 싶지 않으면 안 쓰면 되지 않나 생각했기 때문이다.

"선생님께서 가능성이 있다고 하시면 한번 열심히 해보려고요."

그 학생들은 '하고 싶음'이 아니라 '할 수 있음'에 더 관심이 많았다. '하면 된다'가 아니라 '되면 한다'의 마음. 나는 누구에게도 답을 주지 않았다. 답을 몰랐고, 알아도 줄 수 없었다. _141쪽


나는 그의 책에서 무엇보다 '여행'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인지할 수 있었다. 그의 책 가운데 <여행의 이유>에서, 굳이 작가1 다음으로 여행자였음을 적시한 것 처럼 말이다. 작가는 이 책에서 여행이라고 직접적인 언급은 안했지만, 단 한 번의 삶 속에 포함되지 않았던 인생에 대한, '어쩌면 나에게 가능했을지도 모를 어떤 삷ㅇ을 아주 구체적으로 구련본다. 후회는 아니다. 상실감에 가깝다. 살아보지도 않은 인생을 마치 잃어버린 것처럼 느끼는 것이다'(184쪽)라고 했다. 나는 작가에게 여행이야말로 인생의 상실감과 잃어버린 인생을 '내것화(化)' 시키는 방식으로 이해하기로 했다.


'살아보지 않은 인생, 다시 말해 내가 살아갈 수도 있었을 삶이란 내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세상과 비슷하다. 나는 거기 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없었다. 그게 전부다.'_ 185쪽


단 한 번의 삶, 그것은 어떠해야 할까? 나는 의지가 함께 하는 삶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끝이 없다며 생각하고선 오만과 편견으로 둘러쌓인 삶이 아니라 인생의 소중함은 사람 모두에게 동일한 것이라고 사유하는 습관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단 한 번의 삶은 소유와 승리여야 한다고 확신하는 사람들 세상이 되었다. 작가 처럼, 단 한 번의 삶이 단 한 번만 쓸 수 있는 예쁜, 착한 글로 표현될 수 있었으면, 그런 삶들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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