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죽기 전까지 사랑과 행복은 지속되어야 한다고…
‘피그말리온은 사이프러스의 왕이자 조각가였다. 그는 세상의 어느 여자에게서도 사랑을 느끼지 못했다. 그래서 자신이 사랑에 빠질 만큼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여인을 조각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흘러 아주 아름다운 조각품이 완성됐다. 피그말리온은 완성된 여인상을 사랑하기에 이른다. 여인이 조각상이라는 조건에 걸리게 된다. 사랑의 아픔에 시달린 피그말리온은 아프로디테 여신을 찾아가 자신의 사랑을 이루게 해달라고 부탁한다.
터무니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간절한 소원을 빌고 돌아온 피그말리온은 큰 슬픔에 빠진다. 그는 자신이 만든 조각품 여인을 끌어안았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차갑기만 했던 조각품 온도가 따뜻하게 느껴진 것이다. 피그말리온은 조각품 여인에게 입을 맞췄다. 따스한 체온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잠시 후 여인의 심장 박동이 그의 가슴으로 전달됐다. 조각상 그 모습 그대로 아름다운 여인으로 변한 것이다. 피그말리온은 바로 이 여인과 결혼하여 행복하게 살았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내용이다. 이 이야기는 ‘피그말리온 효과’라는 용어를 만들어 냈다. 이 효과는 강한 희망과 믿음이 현실로 이뤄지는 것을 말한다. 희망과 믿음으로 충만한 사랑은 막힘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신화다. 바로 그런 사랑으로 세상이 움직인다면, 온 세상은 하트 모양처럼 굴곡 없는 일상이지 않을까.
우리 모두에게 너무나 유명한, 그러나 오래전 고인이 된 청마 유치환 시인에게는 이영도라는 연인이 있었다. 경남 통영여중 교사이면서 시인이었던 이영도는 남편을 일찍 잃고 혼자 살다가 유치환을 만나게 된다. 유치환은 그녀에게 숱한 편지를 보내고, 그녀만을 위한 연모의 시를 많이 썼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 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중략>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유치환은 그 유명한 시 <행복>에서 사랑을 하는 것이 더 행복하다고 노래했다. 그는 사랑과 행복에 대한 관념의 의미를 현실적 언어로 쉽게 표현했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 보다 행복하나니라…’.
유치환과 이영도의 사랑 이야기를 애써 하진 않겠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애틋한 단어 ‘사랑’과 ‘행복’에 대해 말하려 한다. 특히 우리 주변에서 사랑이 넘치고 행복이 가득한 이야기들이 많이 있다. 언제 들어도 사랑과 행복의 이야기들은 우리를 생동감 넘치게 만들어 준다.
행복은 일방향적 행위가 아니다. 주체와 객체가 있어야 하고, 대상과 피대상이 있기 마련이다. 무조건적 사랑이란 있을 수 없고, 대상 없이 행복해질 수 없다. 사랑이 그렇고 행복이 그렇다. 짝사랑과 외사랑이 결코 행복한 것만은 아닌 것처럼.
그래서 사랑과 행복은 불가분의 관계라고 생각한다. 사랑과 행복이 커지면, 남을 먼저 사랑하게 되고 자기 맡은 일에 대한 몰입도가 높아진다. 사람들의 가슴을 차지한 사랑과 행복이 함박꽃처럼 피어나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청마 유치환의 사랑 편지를 따라 해보자. 유치환은 연인 이영도에게 5000여 통의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받느니보다 행복하다는 유치환 시인의 시구(詩句)처럼, 우리 모두는 사랑하는 누군가에게 사랑의 편지를 보내고 싶어지지 않을까.
‘사랑하는 그대여. 당신을 사랑하는 것이 사랑받는 것보다 행복합니다. 당신을 사랑하고 있으니 나는 진정 행복합니다.’
또 청마가 그랬던 것처럼, 지인들에게 변함없는 사랑의 마음을 가져보는 것이다. ‘내게 그대들이 있어 행복합니다. 그대들에 대한 사랑의 힘으로 비로소 내가 세상 속에 있습니다.’
사랑의 찬사와 행복의 예찬은 멈추지 않아야 한다. 사랑이야말로, 가장 사랑스러운 말이다. 행복이야말로 항상 곁에 두고 싶은 말이다.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여느 사랑이 그리울 때가 있다. 믿고 의논할 수 있는 든든한 선배 사랑이 그립고, 쓴소리도 마다하지 않는 냉철한 친구의 가시 돋친 사랑도 그립다. 언제라도 불러낼 수 있는 술친구 사랑도 그립고, 추억을 많이 갖고 있는 오래된 친구 사랑도 그립다.
세상은 사랑의 굴레 속에서 희망과 행복을 자라나게 된다. 사랑이 보유하고 있는 폭넓은 범위만큼이나 사랑의 원조자를 찾아내기란 쉽지 않다. 우리가 사랑해서 행복함을 느끼는 한 사람이라도 이 세상에 있다면, 그 사랑의 가치는 큰 것이다. 사랑은 믿음이고 행복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대체로 이율배반적이다. 사랑은 그림의 떡처럼 멀리 있을 때가 많다. 사랑을 하면서 무사한 것만은 아니다. 사랑은 사람 마음을 아프게 하고, 불안하게 한다. 항상 기쁨만을 주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처럼 사람을 따뜻하게 하는 인간의 행동은 없다. 그래서 사랑을 하면 마음이 맑아지고, 입이 고와지고, 얼굴은 환해진다.
우리는 사랑에 익숙해 지면 사랑하던 사람들에게 칭찬이나 사랑의 표현이 서툴거나 아예 생략해 버리곤 한다. 사랑하는 마음을 알아주려니 하고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가까운 사람끼리는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 새삼스럽고 쑥스럽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가까운 사이일수록 더욱 풍부한 표현으로 내 마음을 전하는 일이 필요하다. 구체적인 사랑 표현으로 우리가 더욱 돈독해지고 따뜻해질 수 있다면 열 번이라도 더 할 수 있는 용기와 배려가 있어야 한다.
이렇게 좋기만 한 사랑과 행복에도 끝이 있다. 바로 죽음이다. 평소 존경하던 지인이 최근 하나뿐인 딸을 잃었다. 너무 갑작스러운 이별이라 나 역시 여전히 가슴이 먹먹하고 마음이 아프다. 돌이킬 수 없는 현실에서 그동안 쏟았던 사랑과 행복은 종착점에서 움직이지 않는다. 결국 남는 것은 후회 뿐이다.
여름이 폭발하던 지난 8월, 해남 땅끝에 있는 미황사를 다녀왔다. 대웅전 앞 누각 자하루에는 ‘천불’의 모습이 있었다. 다가갔더니 바로 합장의 힘이 생겼다. 부처의 표정은 ‘공(空)’일지라도 마음은 무언가로 가득 채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두 손을 모으고 물었다. “나에게 어떤 욕망이 있나요?” 답이 없었다. 나는, 답을 만들었다. ‘너의 역할에 집중해라!’ 떠나고 남은 것, 그것이 현실이다. ‘떠남’은 물러간다는 것이요 ‘남음’은 너의 역할을 망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나는 마음으로 만든 죽비로 나를 때렸다. ‘부침을 겪은 삶이 더 아름다운 법이고, 부족함이 오히려 가득 참보다 낫다. 이리저리 차이는 돌과 같은 인생이라서 작품을 완성할 수 있고, 아름다움이 번져갈 수 있는 것이다. 명심해라. 떠남은 다시 만남을 준비하는 것이다.’ 사랑과 행복이 죽음으로 중단됐더라도 마음으로 ‘남음’을 만들면 그것은 영원한 것이라는, 나의 방식대로 만든 법문을 마음에 새겼다.
자식을 잃은 나의 지인은 여전히 아픈 가슴을 부여잡고 울고 있다. 나는 그에게 사랑과 행복은 중단되어 떠나는 것이 아니라 남는 것이라고 말해주려고 한다. ‘대상은 떠났지만 사랑과 행복만큼은 제발 떠나보내지 말라고…. 우리가 죽기 전까지 사랑과 행복은 지속되어야 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