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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통 Oct 13. 2021

나는 누구의 ‘대상(對象)’이 될 수 있을까?

대상이 있어야 내가 있다. 이제, 내 마음에 ‘대상’을 저장해보라

급기야 만만해졌다. 세상을 보는 눈이 말이다. 자신감인지 만용(蠻勇)인지는 곧 알게 된다. 나이가 들어감의 착각인지 여부도 마찬가지다. 세상일의 7할은 운(運)이다. 나에게 다가온 운은 6.9할이었다. 이제 곧 0.1할이 나의 목을 조를 것이다. 죽음에 이를 지경에 나타나는 카타르시스를 기대하고 있다. 대상을 찾으면 가능한 일이다.


알아서 해가 빛을 밝혀주고, 알아서 하늘이 열려 숨을 쉬게 하고, 알아서 땅 위에 발 놓음을 허락해준다. 이제는 내가 알아서 세상에 힘을 보여 줄 때다. 그것은 나에게 주어진 목적의 대상이 된다.


세상의 낮과 밤이 바뀌듯 사람의 인생이 순식간에 뒤집어지는 걸 여러 차례 목격했다. 머슴이 양반이 되고, 고문관이 영웅이 되는 장면들. 씁쓸했지만, 그 역시 대상을 잘 만난 운의 힘이었다. 하지만 운이 대상이 될 수는 없는 법이다.


마음 속에서 한 사람을 주시하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운이 좋은 사람 가운데 한 명이다. 무당이라도 돼 답을 찾아보려 했다. 부질없는 짓임을 이내 깨달았다. 그것은 나의 인생이 아닌 거니까. 세상에 공짜라는 것은 없다. 대상 없이 이룰 수 있을까 살펴 본다. 답은 ‘결코 없다’다.


나는 나다. 누가 뭐래도 한 눈 팔지 않고, 내 인생의 길을 또박또박 걸어가는 것이 최선이다. 세상이 만들어 낸 결과를 존중하고, 나에 대한 존경을 유지하면서 말이다. 세상에, 남의 인생에 관심 없는 바보가 될 것이다. 그것 역시 나에게 대상 만 있으면 자신 있다.


내가 문제를 내고 내가 정답을 그려가는 인생을 살아야 한다. 세상이 나를 던져도, 행운의 깃발이 반대편에서 휘날려도, 시류에 휩쓸리지 말아야 한다. 0.1의 신명 나는 기운이 이내 곧 내 차지가 될 수 있다. 그저 조금 늦더라고 워낭소리 울리며 소처럼 살아야 한다.


소처럼 일하는 직장인의 출근길은 항상 피곤하다. 어깨 가득 얹혀진 무게가 맷돌 같다. 누구나 구름처럼 가벼운 삶을 꿈꾸지만 쉽지 않다. 나의 직장 생활도 그랬다. 지금도 다르지 않다. 세상살이가 전부 거기서 거기다.


이른 아침 시간에 전철 안은 여유가 있다. 그나마 다행이다. 시루 속 콩나물의 처지는 아니니까. 각자의 얼굴 표정에는 대상을 향하는 열의가 묻어 있다.


순간, 정차 역을 안내하는 방송이 흘러나왔다. 앞쪽에 앉았던 그가 눈을 번쩍 뜨고 자리에서 일어나 쏜살같이 객차 문을 향했다. 그의 옆자리에 앉아 있던 그녀까지 모두 떠나 텅빈 자리에 덩그렇게 놓여 있는 휴대전화 한 개. 좌석 맨 끝에 앉아 있었던 동남아 계 젊은이가 전화기를 집어 들어 눈으로 말했다.


‘이거 누구거야? 어떻게 해?’ 아직 그는 한국말이 서툰지 우리 쪽을 향해 전화기를 내밀었다. 반대쪽 좌석에서 게임에 열중이던 젊은이가 전화기를 받아 들고 부리나케 주인을 찾아 나섰다.


주인은 객차 가장 앞쪽 문을 주시하고 있다가 이내 호주머니 이곳저곳을 번갈아 토닥거리더니 자신이 앉았던 자리를 바라보았다. 곧바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 찰나였다. 젊은이가 주인에게 휴대전화기를 건넸다. 주인을 찾은 전화기 대신 주인이 고개를 숙였다. 그 둘은 서로 마주 보고 웃었다. 멀찍이서 나도 따라 웃었다.


출근 현장에서 주인은 전화기라는 대상을 잃을 뻔했다. 사물인 대상은 말이 없다. 하지만 주인은 분신 같은 대상을 손에 쥐었기에 출근길을 축복으로 시작했다. 이처럼 대상은 존재의 가치를 높여준다.


나의 퇴근길, 가끔 일상의 변화를 시도한다. 오늘 같은 날이다. 평소 지하철을 타던 것과 다르게 시내버스를 선택했다. 저녁 시간은 시끄러운 평화에 가깝다. 역설적이지만, 재촉하는 발걸음이 자택의 평화로움을 찾아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강남 길은 예사롭지 않다. 항상 붐빈다. 귓속으로 들려오는 버스 안 라디오 음악은 버스커의 노래로 들린다. 버스의 많은 좌석에 빈자리가 없다. 그래도 지하철이 빈 동굴을 달린다면 오랜만에 탄 버스는 호박꽃 열린 돌담길을 달리는 느낌이다. 자리에 앉으니 비로소 그려진 풍경이다.


이 저녁시간, 바로 앞에 앉은 여인은 열심히 치장을 하고 있다. 메이크업과 색조 화장품 황금색 케이스를 수시로 드나드는 작은 브러시. 진한 화장품 냄새가 다행히 후레시 향이다. 맞선이라도 보러 가는 길일까? 쓸데없는 생각 끝에 그녀의 ‘대상(對象)’이 될 누군가의 행복한 웃음이 떠올랐다. 그녀는 학동역 사거리에서 내렸다. 그녀의 대상하고 어떻든 잘 됐으면 싶다. 버스는 다양한 사연들을 품은 사람들을 하나 둘 씩 정거장마다 쏟아내고 있다.


용혜원 시인의 <우리 함께 가는 길>이라는 시는 이렇다.


그대를 만남이/ 나에게 큰 행복입니다/ 그대와 동행이/ 나에겐 큰 기쁨입니다/ 혼자가 아닌 삶/ 함께 걸어줄 누군가 있다는 것/ 그것보다 더 마음이 든든한 것이 있을까요// 내가 행복한 이유에 대해/ 매일 한가지씩 찾다 보니/ 하루 하루 더 감사하게 되고/ 주변 사람들을 더 사랑하게 되고/ 더 많이 웃을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 함께 가는 길에/ 그대를 만남이/ 그대를 찾음이/ 나에겐 축복입니다// 우리 함께 가는 길에/ 동행할 수 있음이/ 나에게는 행복이기에/ 밤하늘에 떠오르는/ 별 하나 하나가/ 한 떨기 꽃이 될 수 만 있다면/ 그대 가슴에 안겨 주고만 싶습니다//.


얼마 전에 마라톤의 전설이었던 이봉주 선수의 기사를 읽었다. 난치병인 ‘근육긴강 이상증’으로 투병 중이라는 소식이었다. 굽은 등과 90도로 꺾인 목, 지팡이에 의지해 걸어가는 이 선수의 모습은 처연했고 처절했다.


아직도 나의 기억에 선명하게 남은 장면이 있다. 2007년 서울국제마라톤대회에서 이봉주 선수는 37세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2시간 8분 4초의 좋은 기록으로 우승을 차지했다.


2001년 보스톤마라톤대회 우승 이후 수년간 성적이 부진했던 이봉주에게 ‘한물간 선수’라고 여겨지던 시절이었다. 그의 우승은 당시 ‘분투의 미학’이라 불리면서 아름다운 감동을 안겨주었다. 갖가지 악조건에 치열하게 맞서 싸운 이봉주 선수의 도전정신의 가치가 빛났던 시기였다.


이봉주 선수한테 마라톤은 인생을 걸었던 운명의 ‘대상’이었다. 이제 그는 난치병을 ‘대상’으로 안고 있다. 이봉주 선수는 포기하지 않고 도전하는 ‘봉달이 정신’으로 유명하다. 난치병을 대상으로 삼고 있는 이봉주 선수에게 다시 한 번 ‘봉달이의 역전승’을 기대해본다. 그리고 그가 현재의 대상을 뛰어넘기를 응원한다.


한국인이 좋아하는 시 가운데 김춘수의 <꽃>이 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세상은 내가 보고 느끼고 알고 기억하는 만큼만 있다. 마음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결국 모든 존재나 세계가 마음의 투영인 것이다.


그러니, 나는 누구의 대상이 될 수 있을까? 또 나의 대상은 누구일까? 그리고 나의 대상은 무엇일까? 대상이 있어야 내가 있다. 이제, 내 마음에 ‘대상’을 저장해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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